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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셀 게임'은 벤처캐피탈 새 패러다임?
[기획] '셀 게임'은 벤처캐피탈 새 패러다임?
  • 이원재
  • 승인 2000.08.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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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신종 공개기법’ 부각되다 최근 주가폭락으로 애간장…미국선 ‘주가조작’ 유죄판결 사례도
지난 5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아시아 및 실리콘밸리 지역 벤처캐피털리스트 수백명이 모여 컨퍼런스를 열었다.
세계 첨단기술주들의 주가 상승랠리가 주춤해지기 시작한 시기에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의 새로운 전략에 대해 논의한 자리였다.
이 컨퍼런스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가장 끈 대목은 H&Q 아시아 퍼시픽의 쉬 타린 회장의 발언이었다.


쉬 타린 회장은 이 자리에서 최근 홍콩 시장에서 벌어진 역상장(reverse listing 또는 backdoor listing)을 새로운 기업공개 기법의 사례로 들면서 “아시아 벤처캐피털 앞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셸 게임’ 아시아 벤처캐피털 희망으로? 쉬 타린 회장이 가장 칭송한 사례는 리처드 리 짤-카이의 퍼시픽 센추리 사이버웍스(PCCW)의 역상장과 그 성공신화였다.
리처드 리는 홍콩의 유명한 부동산 및 통신 재벌이었던 리카싱의 아들이다.
그의 기업이 홍콩 주식시장에 고개를 들이민 것은 99년 5월. 상장돼 있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조그만 통신회사 트라이콤홀딩스를 인수한 뒤, 퍼시픽 센추리 사이버웍스로 이름을 바꾸고 지난 93년 10억달러를 들여 설립했던 퍼시픽 센추리 그룹을 그 기업 안에 들어앉혔다.
트라이콤홀딩스를 ‘셸 컴퍼니’로 삼아, 세계 통신·미디어사업 진출의 중심이 될 지주회사로 뜯어고친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는 자금조달과 투자가 이어졌다.
덩치가 점점 커진 퍼시픽 센추리 사이버웍스는 지난 5월 세계적 미디어 재벌인 루퍼트 머독과의 경쟁 끝에 홍콩텔레콤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전세계 쌍방향 인터넷TV 프로젝트인 네트워크 오브 더 월드(NOW)를 출범시키면서, 차세대 미디어 콘텐츠와 매체를 모두 확보하는 동시에 미국과 유럽 시장에까지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껍데기’ 안에 들어앉은 인터넷기업은 이제 시가총액이 5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정보통신·미디어 공룡기업이 된 것이다.
이런 원대한 계획을 미리 눈치챘는지, 시장도 엄청나게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가격제한폭이 없는 홍콩 주식시장에서 트라이콤홀딩스의 주가는 리처드 리의 인수가 알려진 날 1200%나 뛰어올랐다.
PCCW, H&Q 이어 에릭슨, 구스그룹도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인 홍콩에 진출해 있는 다른 기업들이 이런 상황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쉬 타린 회장의 H&Q 아시아 퍼시픽도 지난 2월 미국계 벤처캐피털인 JH 위트니와 손잡고 위생시설 배급업체인 애크미 랜디스 홀딩스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물론 위생시설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H&Q는 인수와 동시에 이 회사를 i100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터넷 지주회사로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3월에는 투자회사인 구오코 랜드와 부동산기업인 펑츙기홀딩스가 목표가 됐다.
스웨덴계 투자회사인 인베스터와 스웨덴계 무선통신업체인 에릭슨은 구오코 랜드를 인수해, 이를 셸 컴퍼니로 삼아 홍콩 시장에 진입했다.
이들은 이 기업을 아시아 무선인터넷 분야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해 작업을 진행중이다.
타이완의 재벌인 구스그룹은 펑츙기홀딩스의 지분 75%를 사들인 뒤 K.G.넥스트비전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아시아 인터넷 사업에 진출한다고 발표했다.
셸 컴퍼니를 통해 역상장한 뒤 인터넷 사업 진출을 발표하는 것은 홍콩에서는 이미 하나의 유행이 된 느낌이다.
홍콩에 불어닥친 셸 컴퍼니 바람의 근원지는 어디였을까? 쉬 타린 회장의 말에서 그 속내를 짐작해보자. “그동안 아시아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여러 차례 펀딩을 거쳐 몸집을 불린 뒤 주식시장에 진입하는) 미국식 모델을 무작정 따라하기만 했다.
아시아 벤처캐피털은 실리콘밸리 캐피털의 조악한 복제품이라는 말까지 들었고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잘 작동하지 않았다.
” 훌륭한 원천기술 개발기업들을 찾아 대박을 터뜨리는 실리콘밸리의 성공 벤처캐피털과는 달리, 아시아에서는 그만큼의 원천기술 개발이 없었던 것이 미국을 따라가지 못한 근본적 이유였다고 그는 설명했다.
물론 기술개발과는 거리가 먼 홍콩의 특성을 감안해 새겨들어야 할 말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긴 하다.
사실 공개된 회사를 사들여 상장하는 것은 빠르고 덜 성가시고 더 싸게 먹힐 수 있다.
복잡한 펀딩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고, 적은 자본으로 허덕이면서 회사를 키워가는 어려움이 없다.
게다가 직접 상장할 때 초기에 주식을 사들이는 기관투자가들의 경우, 매우 제한된 조건 아래에서 투자하고 있는데다 일정한 수준의 수익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입맛을 맞춰주기도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
시장상황이 좋지 않으면 공모 자체도 어려워질 뿐더러, 공모 뒤 공모가를 유지하는 문제도 심각해진다.
그러나 이미 공개된 회사를 사들여 신사업을 심으면, 대부분의 경우 주가가 일정한 수준까지 치솟으면서 모두가 이익을 얻는 상황이 된다.
역상장은 두달 만에도 이뤄질 수 있는 반면 신규상장은 보통 다섯달이 걸린다.
다섯달이면 시장상황이 뒤틀려버릴 수 있는 기간이다.
시장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움츠러들어 있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짧은 시간에 증자에 나서 자금조달을 하는 유연성도 발휘할 수 있다.
셸 게임에는 그늘도 여럿 물론 이런 ‘셸 게임’에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첨단기술주가 약세를 보이면서 이런 역상장 기업들의 주가는 더 큰 타격을 입었다.
급등에 따른 대가는 더 톡톡히 치르는 셈이다.
H&Q가 역상장한 홍콩 i100의 경우 지난 2월 발표시기에 20.6홍콩달러까지 올랐으나, 최근 2달러 아래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여기에다 기업가치가 바뀐다는 사실을 과대포장해 시세를 올려놓은 뒤 기존 주주들은 주식을 비싼 값에 팔고 떠나버리는 ‘작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다.
이는 특정세력이 쉬고 있는 회사를 사들여 각종 신사업 발표를 하면서, 동시에 유통시장에서는 허수주문·가장매매 등을 통해 시세를 조종한 뒤 시세차익을 남기는 행위다.
미국에서는 지난 92년 최종 유죄판결을 받은 마그나 테크놀로지의 사례가 셸 컴퍼니를 매개로 주가조작 작전을 벌인 대표적인 경우로 꼽힌다.
마그나 테크놀로지를 소유했던 루빈스타인과 거트스타인은 당시 파산한 상장기업이던 배쉬니 비스킷을 4만5천달러에 사들였다.
그 뒤 이들은 신사업과 관련된 과장된 발표를 잇따라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당시 증권 브로커였던 스톤은 가장매매(실제로 거래가 이뤄지지 않으나 거래가 되는 것처럼 위장한 매매)나 통정매매(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시세를 올리기 위해 거래를 주고받는 것)를 통해 시세를 올렸다.
10센트이던 주가는 어느새 9억50센트까지 뛰어올랐지만, 결국 미국증권업협회(SEC)에 적발돼 고발당한 뒤 법원에서 유죄판결까지 받고 말았다.
마그나 테크놀로지의 사례는 셸 컴퍼니를 이용해 주식시장에 역상장하려는 벤처캐피털들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대목이라고 증권감리 전문가들은 충고한다.
역상장기업이라면 언제든지 유혹이 있을 수 있는 시나리오라는 얘기다.
물론 ‘벤처캐피털의 임무는 단기차익실현이 아니라 성장성 있는 기업에 장기투자해 성장시키는 것’이라는 원래 취지를 여전히 가슴속에 새기고 있는 벤처캐피털리스트라면, 그리고 투자한 벤처기업의 상장을 서두르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다고 판단한다면, 한번쯤 눈을 돌려볼 만한 시나리오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국내에서도 이런 움직임은 이미 시작돼, 최근 한국미디어산업기술이 한일흥업을 인수한 뒤 ‘모헨즈’로 이름을 바꾼 데에는 아즈텍창업투자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 자금과 투자대상 양쪽 모두가 찾기 어렵다는 국내 창투사들에 이런 움직임이 확산될지 관심거리다.
셸 컴퍼니에 쏠리는 의혹의 눈길
최근 국내에서 역상장한 기업들의 주가 움직임을 보면, 누구나 한번쯤 ‘여기에 특정세력이 관련된 주가조작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우선 이런 기업 주가의 오름세가 지나치다.
회사를 개조해 가치를 높이는 일은 하루이틀 만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민감하게 엄청난 기대감을 반영해버리는 주가가 의심스럽다.
20일 연속 상한가 정도는 보통이다.
게다가 이런 오름세에는 거래량도 거의 없는 일이 많다.
거래도 없이 상한가 주문만 마구 몰려들어 쌓여 있는 상황이 자꾸만 벌어진다.
누군가가 일부러 높은 값에 주문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쉽다.
가장 의심스러운 대목은 보통 이런 기업인수 및 변신소식이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전부터 미리 관련기업 주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일반투자자는 결국 공식발표한 뒤 이미 상당히 높은 주가수준에서나 주식을 살 수 있게 된다.
내부정보가 누군가에게 미리 새나갔거나, 대주주가 주가를 끌어올리려고 미리 분위기를 만들어놓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코스닥시장의 시세조종 적발을 담당하고 있는 증권업협회 쪽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증협 관계자는 “최근 역상장기업의 주가 움직임을 볼 때 지나친 면은 있다”며 “감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감리여부에 대해서는 기업사정을 고려해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당국에서 주가조작 조사를 벌인다면 두가지가 관건이 된다고 증협 쪽은 설명한다.
우선 해당기업이 발표한 내용을 잘 지켜가는지 여부인데, 이는 사기죄 해당요건이 된다.
또 한가지는 인수 및 역상장까지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나, 역상장하면서 유통시장에 직접 개입해 사고 판다면 조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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