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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강한 달러시대 종말 고하나
[포커스] 강한 달러시대 종말 고하나
  • 조준상 <한겨레> 경제부 기
  • 승인 2001.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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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금리인하 조치 불구 약세 지속… 미국 실물경제 회복이 연착륙 관건
지금부터 30년 전인 1971년 8월15일의 일이다.
미국은 다른 동맹국들에 그 어떤 사전경고도 하지 않고 달러의 금태환 정책을 포기했다.
이로써 달러의 금태환에 바탕해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았던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물가안정에 바탕한 주식·채권 등 자산가치의 안정, 80~90년대를 휩쓴 자본이동 자유화의 물꼬는 미국의 이 조처로 일어났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뒤인 지난 8월15일 아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 재무부, 월스트리트는 아주 힘겨운 프로젝트에 나선 것이다.
그 프로젝트의 이름은 이렇다.


‘강한 달러’를 연착륙시켜라!
IMF는 8월15일 발표한 연례보고서에서 미국의 무역적자 누적에 따른 ‘달러화 가치 급락 가능성’을 경고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주택시장이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는 것을 빼곤 제조업·소매업·금융서비스업·컴퓨터·반도체 등 전반적인 미국 경기가 6~7월에 둔화 내지 정체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지역경제동향 보고서’(베이지북)을 발표한 지 꼭 일주일 만이다.
지난해 전세계 외환보유액(1조9087억달러)의 76%가 달러 표시로 이뤄져 있을 만큼 부동의 기축통화로 자리잡은 달러의 가치가 급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는 달러의 금태환 정지에 상응할 만큼 파괴력을 지닌 것이다.
30년 전과 다른 것은 ‘긴밀한 협의’를 거쳐 나왔다는 점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전 세계은행 수석경제학자가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관련해 미국 재무부의 입맛에 맞지 않은 보고서를 준비하다 쫓겨났던 전례나, IMF의 대주주가 미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IMF가 이번 연례보고서를 독자적으로 발표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유럽·일본, 연착륙 유도 합주 IMF 보고서 발표 직후 백악관은 8월15일 오전 달러화 투매와 거의 동시에 “미국은 앞으로 계속 강한 달러 정책을 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오후 폴 오닐 재무장관도 “미국은 계속 강한 달러 정책을 고수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번엔 월스트리트가 화답할 차례다.
모건스탠리는 같은 날 수석 외환전략분석가의 입을 통해 “미국 달러화가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며 연착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유로화가 강세를 보이면 유럽지역 제조업체 경쟁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엔화가치 하락은 유로화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게 근거다.
유럽과 일본 역시 달러 연착륙을 유도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강한 유로’는 유럽중앙은행(ECB)의 정책 여지를 넓혀준다.
강한 유로는 수입물품 가격을 낮춰 인플레이션 우려를 덜어주면서,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인하를 단행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준다.
하지만 유럽중앙은행은 긴축정책을 고수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국으로부터의 자본 유출은 세계 금융시장을 불안정하게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유로권 경제를 적극 부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본도 대장성 관료들이 엔화가 강세를 보이면 시장에 개입하겠다는 뜻을 거듭 천명하고 있다.
그 지향점은 달러 연착륙을 향하고 있다.
이런 합주 속에 국제 외환시장에서 달러는 완만한 약세를 보이고 있다.
IMF 보고서 발표 직후 엔화와 유로화 환율은 각각 달러당 119엔대, 0.91유로대까지 떨어지며 4개월, 2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런 달러화의 꾸준한 약세는 지난 8월21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일곱번째 단기금리 인하 조처에도 아랑곳없이 주가가 떨어지면서 8일째 계속됐다.
‘신경제 신화’를 상징해온 미국의 강한 달러 정책은 이렇게 조용히 후퇴하고 있다.
강한 달러는 주식시장의 거품과 정보기술 투기를 부추겨온 잘못된 정책의 상징처럼 됐다.
연간 3600억달러가 넘는 무역적자와 국내 제조업의 극심한 침체는 이를 상징한다.
하지만 조용히 연착륙할지, 시끄럽게 경착륙할지 아무런 보장도 없는 실정이다.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
체력이 떨어지고 긴장감이 떨어져서다.
달러 강세는 상대적으로 쉬웠다.
신경제 환상과 함께 97년 8월 이후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시발로 전세계로 퍼진 금융위기와 맞물리며 쾌속 순항했다.
하지만 달러 연착륙의 과정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분석가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최저 25%, 최대 40%까지 과대평가된 달러 가치가 곤두박질칠 가능성은 도처에 깔려 있다.
구매력 점차 떨어져 경착륙 우려 IMF와 미국 재무부, 월스트리트가 합주하고 있는 달러 연착륙 시도가 성공할 수 있는 관건은 미국 실물경제의 회복이다.
이를 좌우하는 열쇠는 내수시장의 구매력이다.
그런데 그동안 미국 경제를 그나마 떠받쳐온 내수시장까지 정체 내지 하락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올 들어 지난 7월까지 미국 국내 제조업과 반도체를 중심으로 이미 없어졌거나 감축될 예정인 일자리는 98만3천여개로 100만개에 육박하고 있다.
하반기에는 이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90~91년 불황 때 1년 동안 사라진 일자리가 55만5천여개였다는 데 비춰보면,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조차 안 됐는데도 지금의 경기침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이에 따른 내수 파괴는 부유층에게 약 90%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짜여진 부시 행정부의 감세정책 때문에 나중에라도 만회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현 상황에서 부유층은 추가 소득이 생겨봤자 소비를 하기보다는 저축을 늘리는 데 사용할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연준 금리인하의 약발도 이미 끝났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지금까지 연준 금리인하의 효과는 주식시장 부양과 이에 따른 자본이득 증대가 소비로 이어지는 형태를 취했는데, 정보기술 업체들의 실적 저조와 제조업의 침체로 미국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이런 효과가 무너진 것이다.
금리인하는 가계대출을 늘려, 그동안 소비를 늘려온 효과도 감소시키고 있다.
올해 1분기 현재 미국 가계부채는 지난해 4분기보다 5559억달러 늘어나는 데 그쳤다.
1년 전에 비해 증가속도가 2분의 1 내지 3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그럼에도 가처분소득 증가액 962억달러와 비교하면 총 가계부채 증가액이 가처분소득 증가액의 5배가 넘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다.
설사 미국이 심각한 불황을 벗어난다고 해도 더 큰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는 것도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높은 가계부채 때문이다.
미국 경제가 본격적인 불황이 빠져들면 ‘미국보다 덜 나쁜 곳을 향해’ 대규모 자본유출이 일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6월 국제결제은행(BIS)이 발표한 연례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미국의 경상적자는 4350억달러인 반면 외국인 직접투자와 포트폴리오 투자는 모두 4870억달러가 순유입됐다.
경상수지 적자를 외국자본으로 메워온 것이다.
반면, 유로화 지역은 경상적자 60억달러, 자본순유출 1440억달러를 기록했다.
일본의 경우 1180억달러의 경상흑자를 기록했지만, 자본순유출액은 600억달러에 이르렀다.
강한 달러의 종언은 이 추세의 역전을 뜻하는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번 IMF의 달러 급락 가능성 경고 역시 때늦은 ‘뒷북치기’로 드러난다면, 세계금융 시장은 큰 혼란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는 미국 재무부와 IMF, 월스트리트로 이뤄진 3각 복합체의 거만한 ‘위기관리 능력’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뜻하는 것이자, 동시에 좀더 평등한 국제금융체제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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