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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다시 덧난 대우채 환부
[포커스] 다시 덧난 대우채 환부
  • 정남구 <한겨레> 경제부
  • 승인 2001.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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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위·법원, 잇따라 고객 손 들어줘… 손실 책임논란 본격화될 듯
‘대우사태’의 상처가 2년 만에 다시 덧나고 있다.
투신펀드의 대우채권 투자로 인한 손실을 둘러싸고 투자신탁회사와 고객간에 책임논란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소송사태가 이어질 조짐도 보인다.


사태의 발단은 1999년 8월12일에 이뤄진 금융감독위원회의 대우채 환매제한 조처다.
당시 금감위는 8월13일부터 수익증권을 환매할 경우 대우채권 부분에 한해 환매를 제한하는 조처를 취했다.
투신사 수익증권에 대한 고객들의 환매사태가 이어지자 그것이 금융시장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비상조처를 취한 것이다.


우선 기관투자가들에게는 대우채권 부분에 대한 환매를 전면 중단시키고, 훗날 대우채권을 매각해 회수 가능한 만큼만 받아가도록 했다.
개인투자자에 대해서는 대우채권 부분을 당장 환매하면 50%만 주고, 더 갖고 있으면 대우채 손실비율에 관계없이 기간에 따라 원금의 80%와 95%를 보장해주기로 했다.
훗날 기관투자가들은 대우채권 원금의 50% 가량을 회수하는 데 그쳤다.


편입비율·추가편입 등 쟁점 수두룩 최근 재연되고 있는 첫번째 쟁점은, 금감위의 이런 환매제한 조처가 적법한 것이었냐 하는 점이다.
만약 환매제한이 적법하지 못했다면, 기관투자가나 개인투자자 모두 대우채권으로 인한 손실을 배상받을 근거가 생긴다.
사실 환매제한 조처 이전만 해도 투신사 펀드에 가입한 고객이 원금 일부를 까먹는 일은 없었다.
투신펀드는 이른바 ‘장부가 평가방식’을 써왔기 때문이다.
즉, 펀드가 채권을 사면 산 가격을 장부에 적은 뒤 채권 이자를 365일로 나눠 날마다 이자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펀드가치(기준가격)를 평가했고, 고객들은 이를 기준으로 펀드에 가입하거나 환매했던 것이다.
만약 펀드가 편입한 채권이 부도나게 되면 그에 따른 손실은 투신사나 펀드를 판매한 증권사가 책임졌다.
갈수록 이자가 붙는 상품이었지, 투신사의 운용실적에 따라 고객이 돈을 받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탁상품이 아니었던 셈이다.
대우사태를 계기로 펀드 평가방식이 바뀌었다.
채권의 시장가치를 그날그날 펀드가치에 반영하는 ‘시가평가’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하지만 대우채권에 대해서까지 부분적으로 이를 적용하는 것이 적법하느냐가 계속 논란이 돼왔다.
현재까지 지방법원에서는 판결이 엇갈렸지만, 고등법원은 “환매제한 조처는 적법했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분쟁의 소지는 많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지난 8월19일 한 개인투자자가 한국투신을 상대로 낸 분쟁조정 신청에서, 투신 펀드가 한 종목에 대한 투자한도(10%)를 넘긴 점을 들어 고객에게 손실을 물어주라고 결정했다.
이 고객은 99년 2월과 6월 한국투신의 2개 수익증권에 2천만원과 5천만원을 투자했다.
그런데 한국투신은 두 수익증권에 한 대우 계열사 채권을 자산의 10.71%, 25.02%까지 편입했다.
금감원 감독규정은 어느 한 종목을 펀드에 10% 이상 편입하면 안 되도록 했는데 이를 어긴 것이다.
이에 대해 금감원은 10%를 넘겨 투자한 부분에서 생긴 손실 320만원을 투신사가 물어줘야 한다고 결정했다.
분쟁 대상이 된 펀드의 가입고객은 6천여명이며, 한국투신이 두 펀드의 고객들에게 물어줘야 할 돈만 30억원이 넘을 것이라고 금감원은 추정한다.
전체 투신사로 보면 수만명이 분쟁조정을 신청할 것은 뻔한 일이다.
대우채 손실과 관련해 관심을 끄는 또다른 사례는 대우사태가 난 뒤 투신사가 대우채권을 새로 펀드에 편입한 경우다.
이미 투자위험이 커져버린 대우채를 투신사가 뒤늦게 추가 편입함으로써 고객손실이 더 커진 데 따른 책임논란이다.
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엇갈리고 있다.
서울 남부지원은 지난 6월 현대정유가 삼성투자신탁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투신사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정부가 대우를 지원하기 위해 삼성투신에 대우채를 편입하도록 관여한 사실에 비춰 삼성투신이 (대우채를 추가 편입한 것은) 선량한 관리자로서 주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정부가 관여한 것이 문제였는지 여부는 판단에서 제외됐지만, 어쨌든 투신사에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뒤집는 판결이 최근 나오면서 파문이 커지고 있다.
서울지법 민사21부는 8월20일 전기공사공제조합이 한국투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판결에서 투신고객인 조합 손을 들어줬다.
조합은 99년 5월 한국투신의 수익증권을 매입했다.
그런데 한국투신쪽이 그해 7월31일 대우 계열사 채권 4억여원어치를 추가로 편입한 것이 문제였다.
조합쪽은 이로 인한 손실을 투신사에 배상하도록 요구했고, 법원은 1억1900만원을 물어주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한국투신증권이 대우의 자금사정이 악화된 상태임을 알고도 대우채를 신규 취득한 것은 펀드 가입고객에 대한 관리자로서의 주의 의무 위반”이라고 밝혔다.
법원은 이어 “대우 지원을 위한 금융당국의 지시나 채권단의 결의를 일방적으로 따랐다 해도 이는 투신사와 금융당국, 채권단 사이의 문제일 뿐, 투자자에 대한 책임까지 면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투신사·기관투자자, 법원 판결에 촉각 이런 판결로 투신사들에는 비상이 걸렸다.
소송대상이 된 ‘대우채 추가편입’이 당시로서는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한 투신사 채권운용 담당 임원은 “고객들의 환매요구가 잇따르자 현금을 마련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환매대상 펀드가 보유한 채권을 여유가 있는 다른 펀드로 넘겨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펀드간 편출입은 금융감독원 감독규정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법원은 대우채를 이런 식으로 넘겨받은 펀드의 경우 위험한 대우채를 추가편입한 것으로 보고 투신사에 배상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다.
투신협회의 한 관계자는 “당시 투신사들이 보유한 대우채권 18조원 가운데 상당부분이 이런 식으로 다른 펀드로 넘겨졌다”며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는 채권만도 조단위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투신사들은 이 때문에 “투신사에 책임이 없다는 판결도 있었던 만큼 대법원 판결을 기다려봐야겠지만, 지게 되면 금감위를 상대로 소송이라도 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법원이 고객쪽 손을 들어주더라도 소액 개인투자자들은 소송을 통해 얻을 실익이 크지 않을 전망이다.
대우채권을 원금의 95%까지 찾았기 때문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남은 5% 중에서도 대우사태 뒤 신규편입 분에 대해서만 법원이 손을 들어줬기 때문에 거액투자자가 아니면 소송의 실익이 적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관투자가와 투신사는 사정이 다르다.
기관투자가들은 대우채 편입부분에 대한 손실이 50% 가량이나 되고, 투신사들도 소송에서 지면 작은 회사의 경우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모든 것이 법원의 판단에 달려 있지만, 대우사태의 후유증은 앞으로도 오래 이어질 전망이다.
대우사태 뒤 대우채 추가편입에 따른 투신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어느 시점에 편입한 것부터 인정할지 등 법원이 판결을 통해 말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집단소송제도가 없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개별 소송을 통해 해결돼야 한다.
덕분에 변호사들만 바빠지게 됐다.
투신사, 구조조정촉진법 골머리
대우사태로 한바탕 크게 데인 투신사들은 오는 9월14일부터 시행되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도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은 유동성 위기에 처한 부실기업에 대해 채권단이 채권액 75% 이상의 동의로 지원방안을 확정하면 채권금융기관들은 채권비율에 따라 신규자금을 지원하거나 출자전환을 하는 등의 조처를 취해야 한다.
문제는 은행 같은 금융기관들은 은행 돈으로 기업을 지원하지만, 투신사들은 고객이 맡긴 돈으로 지원을 한다는 데 있다.
고객의 동의 없이 고객돈을 쓰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투신협회의 한 간부는 “지원을 했다가 잘 되면 모르지만, 고객이 손해를 보게 되면 투신사를 상대로 책임을 묻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부는 이런 불만 때문에 채권단 결의에 동의하지 않는 금융기관은 채권단에 보유채권을 매수해달라고 요청할 권리를 갖도록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투신사들은 매수청구권 행사가격이 턱없이 낮지 않겠느냐고 우려한다.
구조조정촉진법에 제정되기 전에도 투신사들은 고객들의 소송을 우려해 부실기업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으로 대응해왔다.
현대건설, 현대정유에 대한 채권단의 지원방침에 투신사들이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 투신사 관계자는 “투신사들의 이런 반발 때문에 정부가 구조조정촉진법을 제정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물론 정부는 구조조정촉진법의 의미와 관련해 “회생할 수 있는 기업에 지원은 안 하고 회생 뒤 성과만 따먹는 투신사들의 무임승차를 막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조조정촉진법은 투신사가 고객들에게 소송을 당했을 경우 빠져나갈 여지를 만들어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법에 따라 한 것인데 어쩌란 말이냐는 항변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우채권을 한 펀드에서 다른 펀드로 옮긴 것이 금융감독원 감독규정상 허용된 것임에도 그렇게 했다가 민사소송에서 패했다는 점을 들어 투신사들은 구조조정촉진법에 따른 지원행위가 소송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
투신협회의 한 관계자는 “부실기업 지원에 말려들지 않도록 아예 문제가 있을 것 같은 기업의 채권은 갖고 있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투신사들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신용이 나쁜 기업들은 돈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쉽게 개선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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