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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연봉인상은 ‘남의 떡’
[포커스] 연봉인상은 ‘남의 떡’
  • 임채훈
  • 승인 2001.01.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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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악화로 동결·삭감 업체 증가…사기진작 차원에서 올려주는 곳도 있어
셋톱박스 제작업체에서 경력 2년차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박아무개씨는 지난달 급여를 받고 막막한 심정이었다.
월급은 나왔지만 짝수달마다 주는 보너스 105만원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지난달 초 80여명이던 직원을 절반이나 해고하더니 이번에는 월급도 줄어들었다.
“회사사정이 어려운 건 알겠지만 직원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월급을 줄인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네요.” 애초 박씨는 1월 중 있을 협상에서 연봉 1900만원을 조금이나마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연봉협상이고 뭐고 다 물 건너간 것 같다.
박씨는 요즘 거의 일손을 놓은 채 인터넷을 통해 다른 일자리를 찾는다.

직원 수 19명인 닷컴기업에 다니는 김아무개씨는 최근 회사 사장의 행태를 보고 이직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다.
지난달 초 회사는 연봉협상을 하면서 12월부터 급여액 중 30%를 임시 삭감하기로 직원들과 합의했다.
2천만원 이상의 고액을 받는 직원은 연봉을 2천만원으로 줄인다는 합의도 이끌어냈다.
사장은 곧 외부에서 투자를 받는다며, 돈이 들어오는 대로 미지급분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원들도 회사사정이 어려운 것을 공감하고 불만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투자가 이뤄졌음에도 사장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일부 직원이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며 항의를 하다 “이런 곳에서 일 못하겠다”고 사표를 썼다.
그제서야 사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미지급분을 서둘러 지급했다.
하지만 김씨를 비롯해 회사에 남아 있는 직원들은 “이렇게 약속을 어기는 기업에 어떻게 온 몸을 다해 정열을 쏟을 수 있겠냐”며 아직까지 분을 삭이지 못한다.
직원 수 50여명인 인터넷방송국에 다니는 김아무개씨도 비슷한 상황이다.
프로그래머 경력 1년차인 김씨는 지난해 연봉 1900만원을 올해도 그대로 받는 선에서 연봉협상을 마무리지었다.
“원래는 깎기로 돼 있었다”며 “그나마 직원 5명을 정리해고하는 바람에 동결에서 끝났다”며 씁쓸한 표정이다.
김씨는 남아 있자니 자신도 언제 해고당할지 몰라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다.
하지만 워낙 경기가 어려워 마땅한 자리가 있을지 걱정이다.
주식으로 대체하는 회사도 등장 연봉협상의 계절이 돌아왔다.
소규모 업체들은 지난 12월부터 연봉협상을 시작했고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기업들은 직원 평가서가 나오는 1~2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연봉을 올리기 위해 사원들이 굳은 결의를 보인 지난해와는 달리 요즘은 연봉을 동결하거나 깎으려는 경영진의 의지가 도드라진다.
증명이라도 하듯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흉흉하기만 하다.
테헤란밸리의 한 업체에서 일하는 홍아무개씨는 “지난달 30%의 임금만 준 곳도 있다”고 말한다.
30명 규모의 이 업체는 비교적 많은 계약을 체결했음에도 자금이 들어오지 않아 직원들에게 임금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홍씨는 전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동결로 협상이 끝나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쉰다.
직원 수 100명 이하의 소형업체만 상황이 나쁜 건 아니다.
규모가 큰 업체도 어려워진 경제를 뚫고나가기 위해 많은 곳에서 연봉을 동결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50여명 규모의 한 경매업체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올해도 1900만원의 연봉이 그대로 이어지지 않겠냐”며 큰 기대를 보이지 않는다.
이 직원은 올해 자신이 속한 팀의 업무 목표가 지난해에 비해 700% 인상됐다며 한결 무거워질 어깨를 벌써부터 추스린다.
이 회사 인사담당 임원은 “연봉협상을 3월부터 진행할 예정이라 아직 세부사항은 결정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올해는 어떻게 해서든 수익을 내야 하기 때문에 직원들 연봉을 기대만큼 올려주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대신 공모가인 4만원의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주가를 어떻게 해서든 끌어올려 손해분을 보존해주겠다고 덧붙였다.
또다른 소프트웨어 제작업체도 주식으로 연봉을 갈음할 예정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엽봉협상 때는 직원들의 급여를 대폭 인상했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그 이전 급여 수준이 워낙 낮아 현실화하기 위해 상승폭이 높았다”며 “올해는 분명 인상폭이 많을 거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 업체 역시 “우리사주를 팔 수 있는 시점에 주가를 올려 직원들 연봉을 보존하는 방법을 써야 할 것 같다”는 자세이다.
공모가 2만2천원인 이 업체 주가는 현재 1만원을 밑돌고 있다.
국내 한 포털업체도 소폭 인상에 그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업체의 한 담당자는 “연봉인상의 80%는 실적이 좌우한다”면서 “개인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동결이 많을 것 같다”며 회사 내부 사정을 전했다.
“임금은 고정비용 아닌 투자” 동결이나 삭감이 대부분이지만 인상을 하는 업체들도 있다.
최근 2002월드컵 입장권 판매대행권을 따낸 인터파크 직원들은 소폭이라도 연봉이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행권을 따내기 전에는 깎이지만 않으면 좋겠다며 움츠렸지만 최근 대행권을 따내면서 회사 분위기가 반전됐다.
인터파크 이예린 팀장은 “개인이 희망연봉을 적어내면 팀장, 담당임원, 인사위원회 3단계를 걸쳐 평가를 한다”며 “개개인의 실적에 따라 다르지만 업무목표를 달성하면 개인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편”이라고 말했다.
안철수연구소는 다른 업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많이 인상하는 분위기다.
안철수연구소 성백민 과장은 “올해 인상분은 전체 평균 10%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평균 15% 인상에 비하면 적은 수치지만 다른 벤처기업보다는 높다.
하지만 성 과장은 “연봉을 많이 올려주면 회사 고정비가 많아져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라며 “급여를 올리기보다는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 지급 위주로 갈 것”이라고 말해 연봉인상이 회사 전체로는 부담이 된다고 덧붙였다.
그나마 몇몇 잘나가는 업체들은 사기진작 차원에서 연봉을 올려주고 있지만 대다수 소형업체들은 날씨만큼이나 추운 연봉협상을 벌이고 있다.
직원들은 인상은 고사하고 동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회사에 아쉬운 마음은 감추지 못한다.
최근 동결 수준으로 연봉협상을 마친 김아무개씨는 “임금을 직원들에 대한 투자가 아닌 고정비용으로만 바라보는 경영진의 시각이 아쉽다”고 말한다.
경영진도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잠시만 동결·삭감할 뿐 올 연말에 실적이 좋으면 전부 다 보상해주겠다는 입장이다.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원들이 야속할 뿐이다.
99년 말부터 온라인 사업을 시작한 한 업체 사장은 “사원들이 나가지 않고 이 추운 겨울을 견뎌줬으면 하는 마음뿐”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삼성경제연구소 정권택 수석연구원은 “외국은 시장에서 연봉이 어느 정도 결정돼 있지만 국내에서는 같은 직종이라도 회사에 따라 연봉이 천차만별이다”라며 “이런 상황에서는 주변의 연봉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개인의 사기가 좌우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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