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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오감] ⑧ 에필로그
[디지털&오감] ⑧ 에필로그
  • 이경숙
  • 승인 2000.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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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전 서라벌이 디지털로 부활한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 세계 최대 가상현실체험관…국내 가상현실 원천기술 확대 기반
“우와~ 나비다, 잡아 잡아.”
“허어, 안경을 벗어뿌리니까 저그 앞으로 가뿌리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주제영상 ‘서라벌의 숨결 속으로’가 시작하자 천년 시간여행의 안내자로 나타난 나비들이 객석을 휘젓고 날아다닌다.
가상현실 참여자들 사이에서 일대소동이 벌어진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상의 나비를 쫓아다니는 아이들, 편광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칠순 노인, 마구 폴짝거리는 아이들을 잡아앉히면서도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날아다니는 나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저씨, 아줌마들…. 좌석 오른쪽에 달린 가상현실 조작판에 익숙해진 참여자들은 나비들을 왼쪽, 오른쪽으로 보냈다가 앞으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멀리 내몰기도 하며 즐거워한다.
나비는 나풀거리며 참여자들을 1천년 전 서라벌의 남산으로 이끈다.
거기서 참여자들은 옛 신라인의 염원을 담은 불상과 부조들과 마주친다.
참여자들의 주변으로 그 시절에 흘렀다는 시냇물 소리와 소나무 향기가 휘감아돈다.
천년 전 솔향 속에 나비들이 노닐고 참여자들은 이윽고 황금기 신라문화의 대표적 문화재인 월정교를 건너 왕들의 침소인 월성의 월상루에 올라 아침을 맞는다.
사해바다를 축소한 안압지의 고요한 수면 위에서 연꽃잎과 함께 노닐기도 한다.
동양 최대의 사찰 황룡사를 아랫층부터 꼭대기까지 훑어보고 첨성대 안에 들어가 천년 전 별빛의 세례를 받는다.
유리벽 때문에 가까이 가볼 수 없었던 석굴암도 본존불의 뒷면까지 세세히 들여다본다.
석굴암을 제외하고는 모두 디지털로 재현하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던, 이미 사라지거나 자취만 남은 문화재들이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취재차 일본에서 온 <고베신문>의 기자 도시카게 준코(31)는 한국의 영상기술에 감탄했다고 말한다.
편광안경을 쓰고 보면 나비가 눈 앞에 날아다니는 듯 보이거나 연꽃이 만개한 호수 속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놀라웠다는 것이다.
일본 낭코의 입체영화관보다 더 재미있었다고 도시카게 기자는 칭찬한다.
<산요신문>의 기자 야스히로 아카이(35)는 입체영상기술을 문화재 복원에 접목한 데 감명받았다고 한다.
일본에선 주로 오락기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사용하는 것과 비교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 해설이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극장식 가상현실 체험관이어선지 이들은 ‘서라벌의 숨결…’의 가상현실과 기존 입체영상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라벌의 숨결…’이 입체영상과 차이점은 실시간으로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을 재현하고 참여자들과 상호작용한다는 점이다.
제작자인 경주세계문화엑스포 www.cultureexpo.or.kr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영상미디어연구센터 vdream.kist.re.kr는 자료분석과 고증을 토대로 1천년 전 서라벌 도시를 가상현실로 복원했다.
40km×52.8km의 실제 지형을 위성촬영해 이미 사라졌거나 훼손된 문화재들과 옛 신라인들의 생활을 모두 재현해냈다.
참여자는 선택에 따라 왕족들의 화려한 침소인 월성으로 갈 수도 있고, 지짐냄새 풍기는 서민들의 저자거리를 가볼 수도 있다.
소낙비 오는 날의 첨성대에선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천둥의 진동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엑스포에서는 가상현실 극장이라는 공간적 한계 때문에 마치 단체여행처럼 미리 정해진 코스 안에서만 천년 전 서라벌이 공개된다.
국내 최초·최대 몬스터컴퓨터 맹활약 중 ‘서라벌의 숨결…’을 상영 중인 주제영상관은 국내 최초의, 세계 최대의 가상현실 극장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설계한 이곳의 네트워킹 시스템은 좌석에 설치된 6개의 키패드를 통해 651명이 한꺼번에 상호작용할 수 있다.
일본의 옛 교토를 재현한 토판(Toppan)이 25명, 중남미에서 가장 큰 테마파크인 레이노 어벤츄라(Reino Aventura)가 최대 34명까지 참여할 수 있다.
주제영상관은 공연무대도 갖추고 있어 가상현실을 배경으로 공연을 펼치는 ‘혼합현실’도 가능하다.
여기엔 국내에선 처음으로 몬스터 모드 컴퓨터(SGI의 ONYX 2-R)가 도입되었다.
케이블로 연결된 중앙처리장치(CPU)가 14개로 국내에서 최대용량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장착된 그래픽 파이프는 6개로, 입체영상을 1초에 30장까지 그려낼 수 있다.
기존의 국내 가상현실 시스템이 1초에 15장 정도 그릴 수 있었던 데에 비하면 두배 이상 빨라진 속도다.
입체영상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벨기에 기업 바코가 제작한 고해상도 프로젝터 3대가 사용됐다.
또 가로 27m, 세로 8m의 반원형 대형스크린은 은빛으로 고르게 코팅돼 편광으로 쏘아지는 빛을 완전히 반사할 수 있게 설계됐다.
편광기법이란 한쪽 눈엔 세로선을, 다른 쪽 눈엔 가로선만을 보여줘 평면영상을 입체로 보이도록 착시를 일으키는 방법이다.
주제영상관은 또 사방팔방, 상하전후 등 12채널의 입체음향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특히 바닥의 저음재생스피커(Wooper)는 북처럼 낮은 음을 사용해 좌석에 진동을 전한다.
좌석 아래에는 분사장치가 있어 5개의 인조향을 섞은 가상현실의 내음을 참여자에게 전한다.
분사된 향취는 다음 향취를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제 시간에 없어져야 하는데, 효과적 환기를 위해 주제영상관은 냉난방공조시스템을 사용했다.
냄새의 합성과 분사 뿐 아니라 제거에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vis’ 등 100% 국산 소프트웨어 눈길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긴다.
“이렇게 주제영상관에 도입된 컴퓨터, 스크린, 프로젝터까지 거의 모든 장비가 외국 제품인데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성과라는 것이지?” 가상현실 주제영상관의 가장 큰 소득은 100% 순수하게 우리 기술로 소프트웨어를 채웠다는 점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영상미디어연구센터에서 실무를 담당한 고희동(42) 박사는 100% 디지털, 100% 실시간으로, 100% 우리 기술, 100% 우리 기획으로 새로운 시도에 성공했다는 점을 가장 큰 성과로 꼽는다.
가상현실 영상을 구현한 ‘vis’(visualizer의 약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문화재의 디지털 복원을 위해 개발한 소프트웨어다.
흔히 쓰이는 ‘멀티젠’이 하나의 가상현실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유연하게 옮아갈 수 없는 등 융통성이 떨어지는 데 반해 ‘vis’는 융통성이 매우 높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 문화재의 디지털 복원에 적합한 언어(Script Language)로 짜여 있어 장면들을 데이터데이스로 만들기 편리하다.
그러나 이 도구의 상용화는 아직 먼 일이다.
SGI 컴퓨터에 맞도록 디자인된 데다 국내외 시장이 그리 넓지 않기 때문이다.
입체음향과 향취, 진동 발생 시스템도 우리의 기획력과 기술력이다.
음향효과를 맡은 한양대 작곡과 이돈응(45) 교수는 현재에는 들을 수 없는 천년 전의 소리를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고 말한다.
남산에 서면 지금은 흐르지 않는 천년 전의 샘물 소리가 참여자의 주위를 휘감는다.
황룡사 9층 목탑을 탑돌이할 땐 스님들의 불경 소리가 참여자의 위치에 따라 좌에서 우로 입체적으로 이동한다.
이 교수는 스테레오로 녹음된 소리를 컴퓨터에 넣어 볼륨을 조절하고 필터로 걸러 입체음향을 만들었다.
아직은 극장식 가상현실의 한계 못넘어 대규모 가상현실 극장을 처음으로 시도하는 만큼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극장식 가상현실은 여러 명이 투표형식으로 참여하는 시스템이어서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한명 한명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가령 나비를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상호작용을 한다고 하자. 참여자 중 자신이 지시한 방향대로 나비를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은 확률적으로는 1/4인 160여명뿐이다.
컴퓨터가 참여자들이 보내는 신호를 순간순간 집계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시한 방향으로 나비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여자가 실시간의 가상현실에 참여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기 어렵다.
또 장면이 전환할 때는 화면이 튀는 현상이 나타났다.
원래 가상현실에서 오감을 재현할 때는 실기간 시각정보의 변화에 맞춰 청각과 후각 등 다른 정보를 전하는데, ‘서라벌의 숨결…’은 청각 정보에 시각정보를 맞췄다.
이 역시 정해진 시간에 상영을 마쳐야 하는 극장식 가상현실의 한계 때문이다.
실시간의 영상이 미리 녹음된 음향정보를 따라잡으려니 당연히 부분 부분 장면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었다.
후각정보도 솔향 하나만 사용했다.
넓은 관람석을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향취로 채우고 또 빼기에는 너무 많은 분량의 냄새 원액과 환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국내에 축적된 노하우가 없다는 점이 연구원들을 힘겹게 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영상미디어센터 진종욱(27) 연구원은 가상현실 시험가동 중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스크린이 가로 27m, 세로 8m로 워낙 대형이다 보니 입체영상이 스크린 양쪽에서 심한 왜곡을 일으킨 것이다.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왜곡은 바로 잡히지 않았다.
진 연구원은 고민 끝에 벨기에에 있는 바코 본사에 이메일을 보냈다.
바코 본사는 ‘콜롬버스의 달걀’같은 노하우를 전해줬다.
‘왜곡으로 왜곡을 잡아라!’ 진 연구원과 팀원들은 퍼져보이는 정도를 계산해 미리 영상을 축소시켜 왜곡을 바로잡았다.
직접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짜고 가동해보지 않으면 쌓을 수 없는 노하우였다.
“원천기술 개발 위해 초고속연구망 필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고희동 박사는 이런 노하우 뿐 아니라 최첨단 장비를 확보한 것이 이번 작업의 큰 성과였다고 자부한다.
특히 주제영상관의 슈퍼컴퓨터는 우리나라 가상현실 원천기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고 박사는 내다봤다.
“원천기술 자체는 우리나라가 뒤지지 않습니다.
다만 연구환경이 그에 따라 주지 않아 다양한 어플리케이션 적용 경험이 부족할 뿐입니다.
서울과 경주, 대전 등 거점을 중심으로 초고속연구망을 형성하면 국내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를 연구자들이 공유할 수 있습니다.
실험적 시도를 많이 해보면 노하우가 쌓여, 개발한 기술들을 더 쉽게 상용화·대중화할 수 있죠. 독일 등 선진국에선 전국 각지의 연구자들이 초고속연구망을 통해 최신 컴퓨터시설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어요.” 가상현실 기술은 아직 비즈니스 모델이 없다.
가상현실 기술은 연구개발에 드는 투자자본의 규모가 엄청난 데 비해 성과물의 경제적 가치는 거의 보장할 수 없다.
우주정거장 개발사업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가상현실 연구자들은 ‘서라벌의 숨결…’에 70억원을 투자한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와 같은 기획자와 사업가들이 더 많이 나타나길 바라고 있다.
최근 눈 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초소속통신사업이 그렇듯, 기술 발전은 창조적 비즈니스 모델의 개발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서라벌의 숨결 속으로’ 시·공간 배경
때는 기원후 760년경 신라 35대 경덕왕.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안정된 상태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에 감사하면서 불교문화를 크게 융성한다.
그 속에서 조각술, 조원술, 건축술은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 최고의 경지로 발전한다.
이때 불국사의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그리고 석굴암이 완성된다.
또 착수 100년만에 황룡사의 대종이 주조된다.
신라왕궁 월성의 월정교, 분황사 약사동상도 세워진다.
1300년이 지난 현재. 이들 문화재들은 숱한 침략, 화재, 도난에 시달려 훼손되거나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디지털 가상현실 기술과 사람들의 열정은 천년 전 신라의 문화를 부활시켰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주제영상 제작팀은 40kmx52.8km의 서라벌 평야의 실제 지형을 위성 촬영해 반경 4km에 이르는 신라 도성 서라벌을 고대도시로는 세계 최초로 가상현실로 복원했다.
여기에는 국내외 학자들의 신라 왕경에 대한 연구성과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종합적으로 반영됐다.
특히 삼국유사에 기록된 360방(坊)의 개념과 삼국사기 기록을 충실히 적용했다.
이에 따라 남천, 북천, 서천, 소금강산, 낭산, 남산이 가상공간에서 1300년 전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고 왕경 내 건물지로 황룡사, 분황사, 안압지, 첨성대, 월정교, 신라왕궁 월성 내 귀정문, 조원전, 월상루 등이 원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헌신과 희생이 낳은 ‘역사의 숨결’ KIST 영상미디어연구센터 고희동 박사 국내외 가상현실 연구자들은 다들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651석이 넘는 대규모 극장에 천년 전의 서라벌을 가상현실로 재현하려면 영상이 아주 밝고 화면이 커야 하는데 현재의 기술 조건으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는 끝까지 밀어부쳐 성공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영상미디어연구센터 고희동(42) 박사는 참여업체들의 헌신이 없었으면 국내 최초의 가상현실 극장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실리콘그래픽스(SGI)코리아, 바코코리아, 디지털캠프, OMG웍스, 액트시스, 이원이디에스 등 참여업체들이 손해를 무릅쓰고 설비와 콘텐츠를 제공해줬다. 위험 부담을 나눈 것이다. 그는 이 업체들 덕분에 기술적 판단을 내리는 노하우를 쌓게 되었다고 말했다. 역사적 사실의 재현은 정보자료들이 정교해 가상현실 구현이 우주여행 등 다른 가상현실보다 훨씬 난해하다. 정밀한 시각자료를 그리려면 컴퓨터에 과부하가 걸리고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미디어연구센터는 대용량 처리 능력을 지닌 SGI 몬스터 컴퓨터와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들로 이 문제를 극복했다. 그 결과 ‘서라벌의 숨결 속으로’는 1초에 30프레임 안팎을 그려낸다. 기존 가상현실 시스템의 두배 속도다. 에 나오는 컴퓨터 그래픽 한 장면을 그리는 시간 동안 43만2000장을 그릴 수 있다. 고 박사는 덕분에 가상현실이 기존 미디어보다 영상의 질이 떨어지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가상현실 기술에 대한 노하우를 쌓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또 미술, 역사, 시각디자인, 음향, 문화재복원, 컴퓨터과학, 기계화학, 건축 등 문화와 과학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제작진으로 참여해 의사소통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의 작업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이것도 다음 연구개발을 위해선 소중한 자산입니다. 이번 ‘서라벌의 숨결’ 프로젝트는 결과보다 과정 자체가 더 큰 의미가 있었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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