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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타임머신] 386SX 컴퓨터
[IT타임머신] 386SX 컴퓨터
  • 유춘희
  • 승인 2000.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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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좋은데 손발이 못 따라가면
80년대 말만 해도 사람들은 i8088을 기초로 만든 XT 컴퓨터를 보면서 언제나 저런 막강한 성능의 컴퓨터를 가져볼 수 있을까 선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나 곧이어 나온 AT의 데이터 처리속도를 본 다음부터 XT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간사한 걸까. 이제는 아예 숫자가 한단계 높아진 386 PC가 나오자 286 PC는 순식간에 고물 컴퓨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텔이 80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발표한 것은 1986년. 이 칩이 나왔을 때 사용자들은 80386을 넣어 만든 PC는 도대체 어떤 성능일까 궁금해 했다.
그해 가을, 컴덱스 전시회에서 컴팩이 ‘데스크프로386’을 선보이면서 386 시대가 시작됐다.
여러 작업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멀티태스킹, 메모리 증대, 처리속도 증가 등 ‘강력한’ 성능을 보여주면서 마이크로급 컴퓨터가 메인프레임 같은(?) 성능을 내는 시대를 연 것이다.
16비트 AT의 데이터 처리속도가 1회당 16비트 단위인 데 비해 386 PC는 1회당 32비트 묶음으로 처리했다.
그래서 AT를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완행버스라고 한다면 386은 잘 닦인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레이하운드에 비유했다.
80286 CPU는 6MHz의 클럭속도로 시작해 최대 20MHz가 전부였다.
그러나 80386 CPU는 처음부터 16MHz로 시작했고 클럭속도가 점차 20MHz, 25MHz로 이어져 33MHz까지 나왔다.
90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386 PC는 우선 SX(Single Extention)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인텔의 80386SX 칩을 채용해 CPU는 32비트로 고속 처리됐지만, 손과 발에 해당하는 입출력 인터페이스 버스는 16비트로 움직이는 ‘기형적인 기계’였다.
클럭속도가 16MHz밖에 안 됐다.
SX 칩 자체가 싼 가격으로 386 PC를 즐길 수 있게 한 일종의 ‘기획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동시에 나왔던 386DX(Double Extention)가 워낙 비싸니까 AT에서 칩만 바꿔 32비트라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386으로 교묘히 포장된 286 컴퓨터 386SX는 기술이 진보됐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상업적 의미는 컸다.
말이 386이지 주변기기 하드웨어 환경은 286과 같은 체제로 움직였다.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제조업체들은 우회적으로 이 기형 제품을 선전하기 위해 갖가지 문구를 들이댔다.
‘가격은 16비트 성능은 32비트’(고려시스템), ‘고성능 32비트를 훨씬 싼 가격으로’(갑일전자), ‘실리주의 컴퓨터’(대우통신), ‘보급형 32비트 마이크로컴퓨터’(에이서컴퓨터), ‘실용주의 32비트 마이크로컴퓨터’(삼보컴퓨터), ‘퍼스널 컴퓨터의 실속주의’(MSI), ‘AT가격에 386 PC를 장만한다’(패밀리컴퓨터). 이들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그럴듯하게 실속, 실리, 실용주의를 내세웠으나 결론은 싼 가격이다.
386 PC라고 부르기는 어색하지만, 그렇다고 286 PC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386 PC의 또 하나 문제는 가격이었다.
SX 제품은 주변장치는 16비트로 입출력되는 제품이라 비교적 쌌다.
그러나 DX 기종은 대당 가격이 AT 가격의 3, 4배나 돼 웬만한 소형 자동차 가격과 맞먹었다.
클럭속도 33MHz, 기본메모리 2MB, 하드디스크 300MB, 확장 슬롯 10개인 삼성전자 제품이 350만원쯤 했고 SX 기종도 그리 싼 것은 아니었다.
클럭속도 16MHz, 기본메모리 1MB, 하드디스크 40MB, 확장 슬롯 6개인 갑일전자 제품이 모니터와 부가세를 포함하지 않고 250만원이었다.
16비트와 차원을 달리하는 32비트 제품의 시조로 기록된 386SX는 짧은 운명을 맞고 만다.
‘가격은 286 성능은 386’이라는 모토가 호기심 많은 초기 수용자의 군침을 흘리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 첨단 제품의 생명은 뒤에 나온 후계자에 의해 끊어지는 법. 286 PC에서 곧장 386DX로 올린 사용자가 많았고 486 PC가 91년 초부터 생산되기 시작해 짧은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386 칩이 개발된 지 3년이 지난 후에야 제품이 나왔으니, 486 PC가 그 틈을 기다려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386 컴퓨터를 가장 많이 판 업체는 금성이나 삼성, 삼보 같은 정통 PC업체가 아니라 한국화약그룹의 고려시스템과 갑을방적 계열사인 갑일전자였다.
90년 한해 386SX 시장 규모는 1만4천대 정도. 두 회사는 386 PC 전문업체라고 스스로 불렀고 전체 시장의 반 가까이를 점유했다.
그러나 고려시스템은 91년 부도를 내면서 무너졌고, 갑일전자는 올 봄 화의를 신청하고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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