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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허덕이는 열도, 넘쳐나는 돈
[커버스토리] 허덕이는 열도, 넘쳐나는 돈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1.09.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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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불황 우려에도 불구 개인소비 증가세… 국내기업 열도 진출 노려볼 만
도쿄의 낮은 화려하고 밤은 휘황하다.
도시 곳곳의 스타벅스 매장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커피를 마시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백화점과 각종 상점이 즐비한 긴자 거리는 오후 내내 쇼핑객들의 물결로 넘실거린다.
밤 그늘이 내릴 즈음 시부야는 술 마시고 노래하러 나온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러나 신문이 전하는 일본 경제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닛케이 평균주가, 17년 만에 처음으로 11000엔대 무너져’, ‘IMF, 일본에 특별금융심사 타진’, ‘도시바, 종업원 1만7천명 감원’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주요 면을 장식한다.
이미 5%까지 치솟은 실업률은 기업들의 대형 구조조정이 이어지면서 머지 않아 6%대에 진입할 전망이다.
엔화 가치는 달러당 118엔까지 올라 가뜩이나 위축된 수출 전선을 압박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올해 1% 이상의 경제성장을 기대했던 경제 전문가들은 마이너스 성장으로 전망치를 수정하고 있다.


10년 불황에 허덕이는 일본과, 넘쳐나는 돈으로 흥청거리는 일본. 언뜻 모순으로 느껴지는 이 두가지 모습은, 그 자체가 일본의 현실이다.
일본의 불황은 한국이 겪은 IMF 구제금융기의 불황과 다르다.
일본의 20대 여자들은 서너달치 월급을 털어 최신 디자인의 에르메스 핸드백을 사고, 30대 남자들은 한달치 월급을 털어 이탈리아제 양복을 사 입는다.
최고급품 핸드백을 들고 양복을 걸친 이들은 65엔짜리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최저가 중국제 셔츠를 할인가에 사기 위해 두시간씩 줄서서 기다린다.
불황기를 사는 평범한 일본 샐러리맨들의 모습은 바로 이렇다.


물가하락이 소비증가로 이어져 일본의 1인당 구매력은, 불황으로 물가가 떨어지면서 오히려 약간씩 높아지고 있다.
세계은행의 보고서 <세계발전지수 2001>에 따르면 일본은 지난 10년간 1~2%대의 낮은 성장률을 보여왔음에도, 전체 경제 규모는 여전히 미국에 이어 2위다.
1인당 국민소득(GNP)은 3만2030달러로 세계 4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살인적 수준이던 물가도 점차 낮아져 소비자극 효과를 내고 있다.
흔히 구매력 비교에 사용되는 빅맥지수는 지난해 2.78에서 올해 2.53으로 내려갔다.
미국 빅맥지수는 2.51에서 2.55로 높아졌다.
미국과 일본 물가가 비슷해진 것이다.
구매력 기준으로 환산한 일본의 국민소득은 98년 2만3180달러에서 99년 2만5170달러로 높아졌다.
순위는 세계 8위에서 7위로 한단계 올라섰다.
일본인 한명이 우리나라 사람 한명보다 1년에 1만달러 가치의 소비를 더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개인 소비가 조금씩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일본경제연구센터의 자료를 인용해, 7월 개인 소비가 전달보다 1.9% 늘어 두달째 증가세를 보였다고 보도했다.
주택투자도 분양주택 착공이 늘어나 1.1% 증가했다.
반면 수출은 줄어들고 수입이 늘어, 7월 국내총생산(GDP)은 0.2% 감소했다.
이것은 단순한 디플레이션 현상만은 아니다.
불황은 일본 기업들의 생산·거래 시스템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니클로 붐’이다.
초저가 브랜드인 유니클로는 지난해 8월 결산에서 매출 2290억엔, 경상이익 600억엔을 내, 일본 최대 유통업체인 이토요카도의 실적을 앞질렀다.
유니클로 야나이 타다시 회장은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올해의 세계갑부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
유니클로의 성공 비결은 다양한 색상의 옷을 대량 생산해 파격적으로 싸게 파는 것이다.
100만장 단위로 생산되는 스웨터와 바지들은 비록 품목은 적지만 색상은 50가지나 된다.
가격은 1900~4900엔 정도로, 다른 회사 제품의 절반 수준이다.
최고 인기상품인 1900엔짜리 셔츠의 경우 지난해 한해 동안만 850만장이 팔렸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생산원가가 낮은 중국 현지공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니클로는 중국 공장에서 생산을 함으로써 임금과 지대 부담을 낮추고, 전체적인 생산 원가를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유니클로의 대성공 이후 일본인들은 해외에서 생산한 물건을 수입해 일본내 가격을 낮추는 것을 ‘유니클로 현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일본 섬유업계는 유니클로의 해외생산 때문에 일본내 섬유업체들이 망할 지경이라면서 정부에 수입제한을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긴 병에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긴 불황 속에서도 활로를 찾고 있는 일본 기업들은 ‘유니클로 현상’에 너도나도 올라타면서, 이 현상을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
연고주의가 강하기로 유명한 일본 기업들이 요즘은 생산가를 낮추기 위해 기존 거래처와 관계를 끊고 일본내 공장을 닫는 대신 아시아 다른 국가들로 거래처와 공장을 이전하기에 바쁘다.
‘유니클로 현상’은 무역동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올해 들어 일본의 수입은 매달 11~24%씩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 기업이 많이 진출한 중국, 싱가포르, 필리핀으로부터의 수입 규모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
반면 한국과 대만으로부터의 수입은 감소했다.
삼성경제연구원 이우광 일본팀장은 “일본의 수입 증가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로 보인다”고 분석한다.
수입 증가는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분업적 관계를 더욱 심화시킨 데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일본 사회가 점점 고령화·정보화할수록 이런 아시아 분업은 더 확대될 전망이다.
고령화는 노동인력 감소를 초래한다.
하지만 정보화는 먼 곳의 젊고 값싼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중국처럼 떠오르는 신흥시장에 대해서는, 정보화를 통해 현지 시장기반을 확대하는 이중효과도 노릴 수 있다.
일본 기업의 선택은 분명해 보인다.
20~40대 저축보다 지출 더 많아 그렇다면 중국보다 시장 규모가 작고, 제품 가격도 비싼 한국은 일본 시장에서 밀려나고 마는 걸까? 일본 시장 현장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도쿄 긴자에 가면 우리나라에선 보기 힘든 진풍경을 볼 수 있다.
금요일 오후 4시, 긴자 중심가의 에르메스 건물은 잘 차려입은 여자들 20여명에 둘러싸여 있었다.
경비원은 무선기로 건물 안에 남아 있는 인원을 확인하면서, 한번에 대여섯명씩 끊어 여자들을 들여보냈다.
에르메스는 5225달러짜리 핸드백을 파는 초고가 명품잡화 브랜드인데, 평일조차 출입인원을 제한할 정도로 손님이 많은 모양이었다.
한 일본인은 이 매장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수백명의 여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고 귀띔한다.
다른 사람보다 신제품을 먼저 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65엔짜리 맥도널드 햄버거와 60만엔짜리 에르메스 핸드백이 동시에 불티나게 팔리는 시장이다.
일본인이 저축을 많이 해 소비력이 작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전후세대인 50대 이야기다.
도쿄에서 생활하는 20~40대 일본인들은 소비지출 규모가 커, 저축을 할 여력이 거의 없다.
특히 일본 젊은 여성층의 소비력은 대단히 높다.
일본 여자들이 좋아하는 ‘루이뷔통’의 경우 지난 한해 1천억엔의 매출을 올렸다.
루이뷔통의 전세계 매출 중 3분의 1을 차지하는 금액이다.
에르메스, 샤넬, 구치 등 고가 브랜드들은 장기불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나라 일본에서 오히려 세계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저축이 습관화한 50살 이상은 불황이 더 계속될 것에 대비해 주머니끈을 더 단단히 조이고 있지만, 젊은 층의 소비심리는 한껏 고조되어 있다.
일본에서 온라인 콘텐츠 사업을 막 시작하려는 한국인 기업가 윤아무개(40)씨는 말했다.
“일본은 일단 시장이 크지 않습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매력적인 시장입니다.

고용정책의 골칫거리 ‘후리타’

회사는 노인을 피하고, 후리타(フリタ)는 회사를 피한다.
‘프리 아르바이터’(free arbeiter)라는 일본식 영어단어의 준말인 후리타는 말 그대로 아르바이트 생활자를 지칭한다.
이들은 부모 집에서 얹혀살면서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간다.
5%의 고실업률 시대에 고령의 퇴직자와 후리타는 정책 담당자들이 풀기 어려운 숙제다.
지난해 일본 문부성과 노동성은 후리타의 증가를 막기 위해 ‘고졸자의 직업생활 이행에 관한 연구회’를 공동으로 결성했다.
일본 정부는 이 연구회를 통해 취직관행 개선방안과 후리타 의식 분석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한편, 인턴십을 정식 교육과정에 포함해 예비 후리타들의 의식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정부가 후리타를 줄이려고 발벗고 나서는 것은 인구 고령화에도 원인이 있다.
일본의 신규 구직자는 전체적인 출생률 저하에 따라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있다.
반면 기업들은 50살 이상의 고용을 기피하고 있다.
조만간 65살 이상 고령자 1명을 4명이 부양해야 하는 고령화 사회를 대비해 전문성과 생산성이 높은 노동자층을 육성해야 하는데, 후리타들은 그 역할을 해낼 수 없다는 게 일본 정책담당자들의 걱정거리다.
후리타가 아닌 젊은이들도 구두를 갈아신듯 직업을 바꾸기 일쑤다.
아르바이트도 취업상태로 집계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에 따라 후리타들을 고스란히 실업자로 잡는다.
일본의 6월 청년실업률은 9.5%로 평균 실업률의 거의 두배 가까이 되는데, 여기엔 상당수의 자발적 실업자들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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