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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P, 가격이냐 성능이냐
ERP, 가격이냐 성능이냐
  • 이정환
  • 승인 2001.03.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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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1만개 중소기업 정보화 지원" 발표에 ERP 업체들 전략짜기 고심

지난 3월2일 한국하이네트는 예정에 없던 워크숍을 다녀왔다. 해마다 두번씩 다녀오는 여느 워크숍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떠들썩한 술자리도 없이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이번 워크숍에서는 며칠 전 중소기업청이 발표한 ‘1만개 중소기업 정보화 지원사업’이 주제로 올랐다.

김현봉 사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라클이나 SAP의 수십억원짜리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이 중소기업 시장을 파고든 지 올해로 5년째. 생각만큼 매출이 따라주지 않아 애를 먹던 터에 마침 정부가 중소기업 정보화에 15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발벗고 나선 것이다.

무엇보다도 ERP를 도입하는 중소기업에 도입비용의 50%까지를 무상으로 지원하겠다고 한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영세한 중소기업들과 가격 다툼을 벌여왔던 영업부 직원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시장점유율 40%를 목표로 올해 매출도 100억원이나 늘려 잡았다. 하지만 김 사장은 냉정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회사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회사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5시간 가까이 이어진 이날 회의는 자못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따져볼수록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가격을 더 낮추라고?

중기청은 ERP 부문에서 올해 1천개 기업을 지원할 계획이다. 지난 2월26일 발표한 사업공고에 따르면 기본형 ERP를 도입하는 기업은 1천만원까지, 고급형 ERP를 도입하는 기업은 2천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정보화지원과 윤범수 사무관의 설명을 들어보자. “많은 기업들이 ERP의 필요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뜻 도입할 엄두를 못내고 있죠. 이번 사업은 시장을 넓히는 대신 가격을 낮춰보자는 취지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가격을 얼마나 낮추자는 것일까. 한국하이네트 등 ERP 업체들이 이번 사업을 환영하면서도 내심 골머리를 앓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스템 하나 구축하는 데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넘게 걸리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1년 동안 1천개 기업에 ERP를 깐단 말인가. 어차피 인건비 장사인데 어디서 가격을 더 낮추라는 말인가. 한국하이네트는 부랴부랴 신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ERP의 모든 기능을 제대로 갖추고 있으면서도 손이 덜가는 제품을 만들 계획이다. 우선은 구축기간을 3개월 안으로 줄이는 게 목표다.

중기청이 명확한 개념을 내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업체들은 좀처럼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기본형 ERP와 고급형 ERP의 개념은 모호하고 낯설기만 하다. 업체들마다 생각도 다르고 그만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영림원은 아예 기본형 ERP를 과감히 포기하고 고급형 ERP에만 힘을 쏟기로 했다. 무리하게 시장을 늘려잡기보다 실속을 챙기자는 계획이다. 어차피 ERP를 도입하고 제대로 쓸 수 있는 기업은 일정 수준 이상 비용을 지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RP는 기업의 문화를 바꿔나가는 작업입니다. 며칠 만에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가격을 낮추려면 최적화를 건너뛸 수밖에 없는데 그래놓고도 ERP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ERP는 결코 완성품 형태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 영림원 김종호 이사의 생각이다.

한편 소프트파워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다. 어차피 중소기업이 쓸 제품이라면 서비스가 좀 부족하더라도 가격을 낮추는 게 우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른 업체들은 아무리 빨라도 3개월이 걸린다는데 소프트파워는 이틀 만에 구축하고 교육까지 끝낼 수 있는 제품을 내놓았다.

컨설팅도 없고 최적화도 없다. 교육도 모아놓고 한꺼번에 할 계획이다.

“필요한 업무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한두가지 업무는 포기해야죠.”

소프트파워 문연수 부장이 생각하는 기본형 ERP는 그렇다. 표준화된 제품을 줄 테니 제품에 업무를 맞춰나가라는 식이다. 케미스도 비슷한 전략을 찾고 있다.

케미스는 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춰 기본형을 1천만원선, 고급형을 2천만원선에 공급할 계획이다. 대신 사용자가 직접 환경을 설정해야 한다.

입맛에 딱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저렴한 가격에 ERP 시스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려고 프로그램을 뜯어고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뺄 건 빼고 비용을 줄여나가야죠.”

유니ERP를 만드는 삼성SDS는 이래저래 걱정이 많다.대기업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에 들어선데다 막상 중소기업들은 가격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렇다고 다른 업체들처럼 가격을 마냥 낮출 수도 없다.

삼성SDS는 매출 200억원인 회사의 경우 1억원 가량을 시스템에 투자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그 위쪽을 고급형, 그 아래쪽을 기본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낮춘다고 낮췄지만 그래도 다른 업체들보다 한참 높은 가격이다. 오라클 ERP를 가져다 ASP(소프트웨어 온라인 임대) 방식으로 서비스하는 넥서브도 마찬가지다. 넥서브는 3년 계약에 5억원 가량을 받고 있는데 더이상 가격을 낮출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중소기업 시장은 빛 좋은 개살구?

중소기업 시장의 딜레마는 가격과 서비스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흔히 서비스를 어느 정도 포기하게 마련인데 시스템 구축이라기보다는 컨설팅 개념에 가까운 ERP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구축한 ERP가 말썽을 빚거나 결국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가격이 낮은 탓에 컨설턴트 한명이 한꺼번에 서너개 업체를 맡는 건 보통이고 끝내놓고 나서도 문제가 터지면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업무를 못할 지경이 된다. 심지어는 1년이 넘도록 업무협의가 끝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중소기업 시장에 뛰어든 업체들이 하나같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실한 서비스로 곳곳에서 말썽을 겪고 있는 마당에 중기청은 가격을 더 낮추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중기청은 기본형 ERP와 고급형 ERP의 기준을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다. 기본형 ERP는 이번에 중기청이 새로 만들어낸 개념으로 생산관리 부분이 빠져 있는 대신 가격이 낮고 구축기간이 짧아야 한다.

어느 기업에나 무리없이 적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환경설정이 가능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단품 소프트웨어들을 얼기설기 짜맞춰 ERP시스템이라고 내놓는 곳도 있는데 과연 어디까지를 ERP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 과제로 남는다. 중기청은 시스템이 구축되고 난 다음 6개월 동안 의무 유지보수 기간을 두고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경우에만 지원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마구 집어먹다가 탈난다는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하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ERP시스템은 차라리 단품 소프트웨어만큼도 못할 수 있어요. 문제가 터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더존디지털웨어 김용우 사장이 고민하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에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까가 관건이다. 어디에나 척척 들어맞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업체가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다.
 

중기청의 중소기업 정보화 지원사업은 올해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에는 ERP를 도입하는 기업에 2500만원씩 25개 기업을 지원했다. 올해는 기본형 ERP라는 낯선 개념까지 만들어내면서 지원금을 1천만원까지 낮추고 대상 기업도 1천개로 늘렸다.

시장규모는 갑자기 부쩍 늘어났지만 ERP 업체들 고민은 깊고도 깊다. ERP를 싸게 뿌리겠다는 의도는 좋은데 그만큼 시장에서 소화할 수 있을까. 그렇게 뿌려진 ERP가 제대로 기능할까. 중기청의 야심만만한 계획을 바라보는 업계의 시각은 아직 불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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