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011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
SK텔레콤의 ‘이색적인’ 광고 문안은 이동통신 시장에서 제 1인자의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다소 거만하게 들릴 정도다.
하지만 여기엔 SK텔레콤의 또다른 고민이 숨어 있다.
3월말 현재 53.11%인 시장점유율을 어떻게든 6월말까지 50% 이하로 끌어내려야 하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4월 신세기통신과의 기업결합 승인조건으로 이런 이행조건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광고문안을 좀더 직설적으로 풀이하면 “제발 다른 이동통신 사업자에게 가입하라”고 권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SK텔레콤은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점유율 낮추기에 나서고 있다.
신규 가입 중단은 물론이고, 경쟁사 영업 대행이라는 ‘특단’의 조처를 취한 것이다.
특히 지난 4월6일부터 SK텔레콤 대리점에서 019가입자를 모집해 주기 시작한 것은 SK텔레콤이 얼마나 ‘절박한’ 처지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SK텔레콤은 “유통망까지 경쟁사에 열어준 것은 마누라까지 내준 꼴”이라고 말한다.
시장점유율을 줄이기 위해 얼마나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SK텔레콤 관계자들의 표정이 그리 울상은 아니다.
점유율 이행 마감시간이 두달여밖에 남아있지 않았는데도 긴박하거나 심각한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관계자들의 말은 시장점유율을 50%로 줄여도 그만, 줄이지 못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진다.
SK텔레콤입장에선 계열사이자 단말기유통공급업체인 SK글로벌의 019재판매가 그리 손해는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SK텔레콤 입장에선 ‘꽃놀이패’에 가깝다.
SK텔레콤 대리점을 통해 019 가입자가 늘어난다면 SK텔레콤은 전혀 걱정할 게 없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지시사항인 50% 이하의 시장점유율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말까지 성공적으로 시장점유율을 낮추면 그 다음부터는 특별한 제재조항이 없다.
얼마든지 막강한 시장지배력과 마케팅, 자금력으로 다시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가 있는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동통신시장의 마이너러티로 전락한 LG텔레콤에 잠깐 가입자를 빌려준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실제로 업계에선 10월 이후부터 SK텔레콤의 시장점유율이 다시 치솟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유통망까지 내주며 시장점유율을 줄이려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어떻게 될까. 그래도 SK텔레콤 입장에선 별 타격을 받지는 않는다.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 부과되는 과징금은 하루당 ‘겨우’ 4억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 과징금은 SK텔레콤에게는 그야말로 솜망방이에 불과하다.
SK텔레콤은 지난 한해 9510억원의 순수익을 올렸다.
하루 평균 26억의 순수익을 올린다는 계산이 나오는 셈이다.
게다가 올해는 48%가량 순수익이 늘어날 것이라는 증권가의 분석을 감안하면 과징금은 그리 부담스런 금액이 아니다.
게다가 공정거래위원회는 ‘성실 이행’ 노력에 따라 과징금의 50%를 줄여주거나 가중시킬 수 있다.
따라서 SK텔레콤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으면 과징금은 2억원으로 줄어든다.
효과 없어도 모양새는 만점 실제 SK텔레콤 대리점들이 4월6일부터 019 가입자 가입을 해주고 있지만 그리 실속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열흘 남짓 지난 4월18일 현재, 재판매를 통한 가입자수는 SK텔레콤 집계로는 5천여명, LG텔레콤 집계로는 2500여명에 지나치 않는다.
2500명이라면 SK텔레콤 1개 지사가 하루 평균 모집하는 신규 가입자 수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SK텔레콤 관계자들은 단말기 보조금을 지급할 수 없고 불경기가 계속 되고 있어 소비자들이 구매를 꺼리는 것 같다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따져봐도 SK텔레콤 대리점을 찾은 고객이 굳이 019로 가입할 이유는 없다.
사실 그동안 업계나 증권가에선 처음부터 019 가입자 대행이 효과가 있을지 회의적인 눈길을 보낸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SK텔레콤 입장에선 시장점유율을 줄이기 위해 획기적인 조처를 했다는 모양새를 보여줄 줄 수밖에 없다.
과징금 문제만 놓고 보면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면서 차라리 벌금을 내는 버티기 전략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시장점유율을 다시 높이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30대 기업으로 공정위 눈밖에 나면 기업활동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게다가 버티기로 일관했을 때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왔던 기업 브랜드가 손상될 염려가 있다.
SK텔레콤 관계자도 “돈만 갖고 기업을 할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우회적으로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
정부의 통신서비스 시장 3강 재편 구도와 맞물려 생각할 수도 있다.
LG텔레콤을 3강의 한 축으로 세우려는 정부의 의지와 SK텔레콤의 조처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한마디로 SK텔레콤이 정부에 보내는 우호적 몸짓인 셈이다.
한명의 가입자라도 아쉬운 LG텔레콤은 SK텔레콤의 구애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LG텔레콤은 유상증자를 앞두고 기업가치를 높여야 하는 절대절명의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019 가입자 대행은 SK텔레콤 입장에선 여러모로 밑질 게 없다.
기업의 유통망까지 개방했다면 “할만큼 했다”는 최고의 전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시장점유율을 낮추지 못해도 최소한 과징금을 2억원 규모로 낮출 수 있는 실속도 있다.
게다가 기업의 정치적·정책적 판단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가장 큰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SK텔레콤이 6월말까지 시장 점유율을 50% 이하로 줄일 수 있는지 여부는 세간의 관심일 뿐이다.
오늘의 적은 내일의 동지가 되고, 반대로 오늘의 동지가 하룻밤 사이에 총부리를 겨누기도 한다. 통신의 역사는 이합집산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동통신 시장에서 가장 큰 이합집산 사례로는 지난 97년 12월, 한통프리텔과 한솔엠닷컴의 PCS 통합망 구축을 꼽을 수 있다. PCS서비스를 시작한 지 채 두달도 되지 않은 상태라 당시 3개 PCS사는 치열한 마케팅 경쟁을 벌이는 ‘적대적’ 관계였다. 이때 가장 먼저 제휴의 손길을 뻗친 것은 한솔엠닷컴이었다. 한솔엠닷컴은 수도권 이외의 전국망을 깔면서 투자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자 한통프리텔과 LG텔레콤에 공동망 구축을 제안한다. 한통프리텔에선 내부 진통을 겪은 끝에 한솔엠닷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당시 초소형중계기를 자체개발해 자신만만해하던 LG텔레콤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한통프리텔과 한솔엠닷컴은 LG텔레콤을 제껴두고 전국을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나눠 공동기지국을 구축한다. PCS 3개 회사가 연합전선을 편 적도 있다. 지난해 4월 SK텔레콤이 신세기통신을 인수하겠다고 하자 3사는 강고한 연대를 과시했다.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의 기업결합으로 SK텔레콤의 독점적 지위가 훨씬 더 강화될 것이라고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PCS 사업자들의 보조금 규모, 영업전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경쟁 관계는 잠시 접어두었다. 공정위의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 결합 승인으로 PCS 사업자의 연합전선은 참패하고 말았다. 이번에 다시 SK텔레콤 대리점의 019재판매로 011-019 연합전선이 형성되자 한통프리텔·엠닷컴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32.43%라는 엄청난 시장점유율을 갖고도 갑자기 마이너러티로 전락한 꼴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한통프리텔·엠닷컴쪽은 맞불 작전으로 직권해지를 늘리는 태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전체 시장 규모을 줄여 SK텔레콤의 시장점유율을 그대로 유지하게 만들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그럼에도 한통프리텔·엠닷컴 관계자들은 격앙된 표정과 달리 다소 느긋하다. 011과 019의 ‘동지적’ 관계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신 삼국지엔 영원한 평화가 없다. |
저작권자 © 이코노미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