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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금감원 ‘먹통’에 전산망 ‘불통’
[IT] 금감원 ‘먹통’에 전산망 ‘불통’
  • 김승호(대한금융신문)
  • 승인 2001.01.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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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견된 금융대란 안이한 대처…인터넷뱅킹·자동화기기 늘리는 게 급선무
인구의 반이 넘는 2800만명이 은행에서 돈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연말 기업자금과 수출입자금을 해결하지 못한 중소기업은 부도 위기에 전전긍긍했다.
우량은행으로 분류되던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을 정부가 나서서 추진하자 두 은행의 직원들은 파업을 택했고, 결국 은행영업이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지난 연말의 금융대란은 금융권 파업 중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 것으로 회자된다.


IT 상식없는 탁상행정이 혼란 부추겨 금감원과 정부 당국은 두 은행의 정보시스템만 장악하면 충분히 영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초강수를 놓았다.
그들의 바람대로 정보시스템은 노조원 손에 들어가지 않고 일부 시스템을 제외하곤 정상적으로 가동됐다.
하지만 금융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디지털경제 시대에 발맞춰 구축한 인터넷뱅킹 시스템은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다운되거나 거래가 지연돼 무용지물이 됐고, 타행환을 통해 현금인출과 계좌이체를 시도한 고객은 몰려드는 거래량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대외계 시스템만 애타게 바라봐야 했다.
시스템이 제대로 반응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두 은행 모두 하루 트랜잭션 수치가 연중 피크(하루 1천만건 이상)를 기록하는 시기에 일어난 일이라 트랜잭션을 효과적으로 소화할 대책이 없었다.
인터넷뱅킹 시스템은 투자 초기여서 아직 소규모였고, 별도의 인터넷뱅킹 원장도 갖추지 않아 호스트 부담이 너무 컸다.
12월27일 CD공동망 거래가 520만건에 달할 정도로 자동화기기 거래가 늘었는데 각 은행이 보유한 대외계 시스템은 연말에 몰리는 자행 거래를 주로 처리하도록 돼 있어, 두 은행의 원장을 경유하는 타행 거래는 처리할 수 없었다.
CD공동망을 운영하는 금융결제원 시스템 자원은 충분한 여유(하루 평균 1천만건)가 있었지만 각 은행의 대외계 시스템 자원이 충분치 못해 사건이 커진 것이다.
은행의 대외계 경유 타행환 거래 비중은 은행 전체 트랜잭션의 10%도 안 되기 때문에 무리하게 시스템 자원을 타행환으로 할당할 경우 자행 거래에 이상이 생길 것을 우려해 자원 분배를 하지 않은 탓이다.
이같은 일은 전산에 대한 기본 상식과 은행 업무흐름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상식 중 상식이다.
하지만 금감원은 정보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일부 점포만이라도 가동된다면 파업에 따른 대규모 혼란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금융기관 관계자들은 두 은행 파업으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면서 “IT에 대한 무지가 낳은 실책이자 탁상행정이 빚은 과오”라고 지적한다.
대지급 프로그램 호환 안돼 무용지물 이 과정에서 두가지 해프닝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번 파업은 전자금융과 자동화기기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준 ‘사건’이다.
오프라인 채널이 없이는 결코 금융서비스 산업을 영위할 수 없음을, 특히 소매금융을 제대로 펼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전산 자원만 확보하면 노조원의 행보가 좁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금감원을 일깨우기라도 하듯 오프라인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됐다.
그동안 과투자 논쟁을 불러일으킨 자동화기기와 전자금융 채널도 역할을 인정받게 돼 향후 금융산업의 전산투자 방향을 가늠케 해줬다.
지난 97년 5개 은행 퇴출사태 때와 비교하면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그때는 정보시스템을 가동시키지 못해 고객의 거래에 응할 수 없었다.
이번 파업도 금감원과 금융기관 경영진들은 정보시스템이 살아 있는 한 큰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사람이 없는 정보시스템은 한낱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교훈도 얻었을 것이다.
금감원은 파업기간 동안 대지급 프로그램을 통해 파업은행 고객의 불편을 던다는 생각을 하고 은행에 프로그램 개발을 종용했다.
하지만 대지급 프로그램은 개발에만 최소 3~5일이 걸린다는 점에서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또 대지급 프로그램을 일부 은행(한빛, 신한, 기업)에서 개발한다 하더라도 국민, 주택 은행의 데이터 형식을 모르면 전혀 사용할 수 없음을 몰랐던 것 같다.
대지급 아이디어는 현금카드를 보유하지 않고 통장만 갖고 거래하는 고객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통장은 은행별로 마그네틱 스트라이프에 담긴 정보의 순서가 다르고 부착 방식도 다르다.
따라서 해당 은행에서 발급한 통장만 지점 단말기에서 읽을 수 있다.
통장 호환이 안 되는 상황에서 통장번호만 갖고 은행공동망 거래를 할 수 있는 대지급 프로그램이 있다면 파업에 따른 불편은 크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너무 앞서간 금감원은 파업이 강경으로 흐르자 대지급 프로그램 개발을 불쑥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금감원은 데이터 전문을 주고받는 네트워크에 대한 상식을 갖고 있지 않았거나 아니면 사람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아 일을 그르쳤다.
데이터 전문을 송수신하기 위해선 전문을 보내는 은행은 송신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고 받는 은행은 수신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수신 은행은 자행의 데이터 양식과 관련한 정보를 송신 은행에 제공해야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다.
파업에 참여한 은행이 수신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없는데, 한쪽에 송신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종용해봐야 헛수고다.
프로그램 개발인력이 없는데 개발을 지시함으로써 고객의 발걸음만 놀린 셈이다.
이번 금융파업을 경험하면서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공기관 파업에 대비한 국가적 비상시스템의 구축을 소원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비상 프로그램을 갖췄더라면 고객은 자신의 금융정보를 공개당할 위험에 노출됐을 것이다.
사실 이는 모든 이들이 간과했다.
파업 비상책으로 타행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해놓은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고객 데이터는 고객 소유이며, 데이터를 보유한 은행은 고객의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이용해야 한다.
이런 데이터를 거래하지 않는 은행에서 갖고 있다면 이는 명백한 개인정보 침해 행위다.
게다가 이번에 발의된 대지급 프로그램은 정상 상황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과투자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경쟁 은행의 데이터 양식을 모든 은행이 공유하는 어색한 상황도 만들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이 있으면 파업에 따른 불편은 덜겠지만 데이터 공개에 따른 부작용(은행 내부인에 의한 해킹과 금융사고 같은)이 더 클 것이다.
결국 ‘등 터진 새우’가 알아서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밖에 없다.
우선 통장과 현금카드를 모두 갖고 있어야 하며 PC뱅킹과 텔레뱅킹, 인터넷뱅킹 등 은행이 고객 편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마련한 다양한 채널에 가입하는 게 최상의 보호책이다.
만약 국가 차원이 아니라 은행 차원에서 대비해야 한다면 대안은 딱 한가지 있다.
자동화기기를 최대한 늘리는 것이다.
특히 편의점이나 공공장소에서 쓸 수 있는 점외 기기가 많아지면 1000번째 대기표를 들고 허둥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수출입업무와 외환업무, 어음교환은 대안이 없다.
결국 파업에 따른 불편을 탓하기보다는 파업을 최소화하기 위해 건강한 노사 문화를 형성하고 그런 쪽으로 여론 형성을 하는 게 훨씬 빠를 일이다.
기계는 어디까지나 기계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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