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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타임머신] 컴퓨터 운명철학
[IT타임머신] 컴퓨터 운명철학
  • 유춘희
  • 승인 2001.01.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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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시대 역술가, 컴퓨터
“원숭이가 변하여 비둘기가 되니 궁리 속이 빠르고 변통술이 교묘하다.
하나를 얻어 둘로 나누어 쓰니 없어도 쓰며 산다.
20세에 봄바람을 만나 모란꽃이 활짝 피니 귀인을 만나리로다.
30세에 벼슬길이 열리니 일이 순조로우며 40세에 운수가 대통하니 뜻한 바를 이룰 것이다.
50세에 손으로 천금을 희롱하며 말년에는 호강으로 세월을 보낼 좋은 운수로다.


‘운명은 정말 타고나는 것일까. 나는 그럼 앞으로 어떤 생을 펼칠까.’ 세상을 사는 사람 누구나 가지는 의문이다.
특히 새해가 되면 올해 신수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하는 일이 안 풀려 답답할 때나 인생의 기로가 될 만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도 그렇다.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인생 그 자체가 궁금증 덩어리다.
컴퓨터에 자리 내준 철학관·처녀보살 컴퓨터가 또 한번 일을 냈다.
자신을 만들어낸 인간을 대상으로 복잡다단한 생을 낱낱이 얘기해주는 역술가로 변신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동양철학가’가 돼 사주, 궁합, 신수비결, 작명 따위를 친절하게 얘기해줬다.
컴퓨터 자체만 해도 신기하던 시절, 사람의 운명까지 알려줬으니 참 대단한 기계구나! 하는 생각을 안 가질 수 없었다.
컴퓨터 점집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은 8비트 컴퓨터였다.
‘사랑의 별점’이나 ‘별자리로 본 당신의 운세’, ‘큐피트 궁합’ 등을 서비스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가볍게 즐기는 수준이었다.
16비트 철학가가 등장하면서 커진 뇌 용량만큼 말이 많아졌다.
초년운 중년운 말년운에다 성격과 건강, 직업, 자식운까지 들려줬다.
생년월일과 시를 입력하면 도트프린터에서 사주가 찍혀 나왔다.
그 구체성이 재미 수준은 넘었지만 프로그램을 짠 사람이나 점을 보는 사람이나 믿거나 말거나였다.
90년 초 주역 프로그램을 담은 디스켓이 시판됐다.
‘X 알파 시리즈’다.
오늘의 운세, 사주, 신수, 궁합 보는 법, 성명해설론, 작명론 등으로 구성해 PC를 동양철학가로 변모시켰다.
제작자 목정언씨는 원래 동양철학가였다.
동양철학의 원리를 삼위일체법으로 분석하고 10년 동안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꼼꼼히 연구한 결과를 통계로 분석해 이론과 실제를 조화시켰다고 했다.
작명론은 5만원, 나머지는 3만원에 팔았다.
컴퓨터 사주 프로그램은 동양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공개소프트웨어로 만들어 천리안 PC서브나 한경 KETEL에 올려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게 했다.
삼보컴퓨터는 홈PC에 궁합, 토정비결 프로그램을 기본 애플리케이션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프로그램을 가장 많이 활용한 곳은 보험회사였다.
지금도 생활설계사로부터 심심찮게 받아볼 수 있는 ‘나의 운세’가 그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PC에 깐 다음 근사한 사업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유원지 모퉁이에서 PC 한대로 사업을 하던 첨단 철학관들이다.
사주 프로그램에 이어 운명감정 프로그램도 나왔다.
이른바 ‘관상 프로그램’이다.
카메라가 얼굴을 포착하면 PC가 이마 넓이, 눈썹 모양, 인중 길이, 눈 코 입의 생김새와 크기를 읽어 관상을 봤다.
같은 내용이 나올 확률이 1천만분의 1이라고 선전했지만 흑백 모니터가 건강의 척도인 얼굴색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코의 높이나 얼굴 근육의 크기는 재지 못했으니 역시 믿거나 말거나였다.
으슥한 뒷골목에 있어도 이름난 철학관은 요즘도 예약제로 손님을 받는다 하니 앞날을 알고 싶은 사람의 욕구는 끝이 없는 것 같다.
요즘 네티즌은 인터넷 역술 사이트를 심심찮게 이용한다.
300여곳에 이르는 역술 사이트는 어림잡아 300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사이트인 사주닷컴 www.sazoo.com은 하루 50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방문자도 하루 최고 3만여명에 이른다.
이 곳에선 새해 소망을 담은 ‘사이버 부적’도 쏠쏠하게 팔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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