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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 “호랑이를 끌어들였다”
[머니] “호랑이를 끌어들였다”
  • 정남구(한겨레신문)
  • 승인 2001.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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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혁 한미은행장, 칼라일 투자유치 주도 후 전격 퇴출 “외국계 펀드를 조심하라.” 한미은행의 최대주주인 칼라일그룹이 임기가 1년이나 남은 신동혁(62) 행장을 전격 갈아치우자 은행가에 퍼지고 있는 얘기다.
신 행장이 하나은행과 합병을 앞두고 자본금 확충을 위해 펀드 자금을 끌어들였다가 합병도 무산되고 행장 자리마저 내놓게 되자 외국계 펀드에 대한 경계령이 떨어진 것이다.
JP모건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한미은행의 지분 40.1%를 갖고 있는 칼라일이 신동혁 행장의 퇴진을 처음 요구한 것은 지난 3월9일이었다.
한미은행 관계자는 “김병주 칼라일 아시아그룹 회장이 주총 직전 신 행장에게 이사회 의장으로 용퇴하고 젊은 행장을 선임하도록 비공식적으로 요청했다”고 말했다.
김병주 회장은 “연륜이 있는 분이 이사회 의장을 맡아주시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이때 이미 두명의 새 행장 후보 명단까지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칼라일쪽 관계자는 신 행장 퇴진 요청과 관련해 “행장과 이사회를 분리하는 것은 외국에서는 보편적인 일이다”며 “지배구조를 개선해 경영의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칼라일쪽은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이사회 의장과 행장을 분리하는 지배구조 개편 문제를 제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주주 된 칼라일, 한미를 흔들다 하지만 칼라일쪽이 신 행장을 전격 교체하기로 한 것이나 교체를 추진한 과정은 그렇게 매끄럽지 못했다는 게 신 행장을 지지하는 이들의 지적이다.
주주총회가 열리기 전 정식으로 지배구조 개편을 확정짓고 인사문제를 거론한 것이 아니라, 신 행장 교체설을 외부에 흘리는 방식으로 사람과 조직을 너무 흔들어놓았다는 것이다.
한 임원은 “신 행장이 대주주의 뜻을 받아들여 하나은행과 합병추진을 중단한 상태에서 신 행장을 굳이 중도에 퇴진시키려는 뜻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신 행장이 지난해 9월 칼라일그룹을 한미은행에 끌어들인 것은 자본금을 늘려놓은 뒤 하나은행과 합병을 추진하겠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미·하나는 ‘괜찮은 커플’이라는 평가가 많았고, 약혼이 깨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부도 두 은행의 합병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칼라일이 들어온 뒤 신 행장의 의도는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했다.
신 행장은 칼라일의 투자를 유치하면서 은행경영의 장기전략까지 좌지우지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대주주가 된 칼라일쪽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칼라일쪽은 ‘약혼 상태’나 다름없던 하나은행과의 합병 추진을 반대했다.
칼라일 관계자는 “하나은행의 부실규모를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 행장은 이에 대해 “김병주 회장이 3월6일 열린 임시주주총회 자리에서 ‘하나은행과의 합병은 시너지 효과가 없으며 주식가치가 올라갈 것으로 보기도 힘들다’는 의견을 내놨다”고 설명했다.
금융계에서는 칼라일쪽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지만, 신 행장과의 갈등은 칼라일컨소시엄의 자금성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펀드 성격상 장기전략을 추진하기보다는 단기적 주가 상승에 더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금융감독위원회는 지난해 칼라일 단독으로 한미은행 투자를 희망했을 때 이런 문제점을 고려해 허가를 하지 않았다가, 칼라일이 JP모건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하자 투자를 인가했다.
칼라일쪽은 투자를 한 뒤 외부 컨설팅을 한 결과 하나은행과 합병보다는 틈새시장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과를 얻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신 행장은 이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처럼 규모가 작은 금융시장에는 틈새시장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한미은행의 덩치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대립이 결국 행장 교체로까지 번졌다는 분석이다.
김병주 칼라일그룹 아시아지역 회장은 3월15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영에 관여할 의도는 없지만, 행장은 대주주 입장을 충분히 반영해주는 사람이라야 한다”고 말해 신 행장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한미은행의 한 간부는 “신 행장이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 됐다”고 표현했다.
펀드 유치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칼라일쪽이 전면에 나선 한미은행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신 행장은 “칼라일이 한미은행에 투자할 때 금융 구조조정에 협조한다고 정부에 약속했다”며 “하나은행과의 합병에 부정적인 것이지 모든 합병에 대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칼라일쪽은 3월30일 결국 하영구(48) 시티은행 소비자금융그룹 대표를 새 행장으로 내정했다.
하지만 이번 행장 교체 과정에서 겪은 조직의 흔들림은 상당한 후유증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신 행장을 옹호하는 쪽과 칼라일을 옹호하는 쪽이 심각하게 대립해왔기 때문이다.
한미은행의 한 간부는 “간부들이 출신지역에 따라 편이 갈라지는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금융계에서는 이번 한미은행장 교체 파동을 놓고 은행에 펀드자금을 끌어들이는 것은 이제 재고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제일은행이 회사채 신속인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도 자금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다.
제일은행은 당시 “불확실한 회사의 채권을 무조건 인수하겠다는 협약에 참여하는 것은 경영전략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다른 은행들이 손실을 각오하고 금융시장 안정에 나서는 데 제일은행만 ‘무임승차’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제일은행은 금융시장의 안정보다는 단기실적을 택했다.
금감위 관계자는 “뉴브리지가 금융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제일은행을 홍콩상하이은행에 넘기고 싶었지만, 조건이 맞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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