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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아나로그 부업, 디지털 부업
[직업] 아나로그 부업, 디지털 부업
  • 한정희
  • 승인 2001.02.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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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주아무개씨는 졸업 후 한 인테리어 회사에 들어갔다.
그의 일은 고객이 원하는 인테리어 컨셉에 따라 완성된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처음엔 꽤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작업이 반복되자 요령이 붙으면서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 자체는 부담스럽지 않아 굳이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웬지 부족한 감이 드는 거였다.
아무래도 작업이 한가지에 편중되어 있어 다양한 디자인 영역을 접할 수 없다는 게 자꾸 맘에 걸렸다.


주씨는 2개월이 지나자 직장일 외에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맘먹었다.
일단 직장은 다니되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펼칠 수 있는 일에 도전했다.
그때 찾은 일이 아파트 조감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보통 ‘아이소’라고 부르는 이 작업은 주씨에겐 단조로운 일의 반복으로 여겨졌던 실내 인테리어보다 훨씬 만족감을 주었다.
그는 그것을 계기로 같은 계통의 아는 사람들을 통해 일거리를 의뢰받아 소위 ‘부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노천카페를 디자인하는 특별한 재미도 맛봤다.
그는 물론 부업이 주업인 회사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쓴다.
요즘 주위를 돌아보면 직장을 다니면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굳이 부업을 하지 않아도 생계엔 지장이 없는데도 일거리를 찾아나선다.
지속적으로 시간을 투여하기보다는 필요한 때에 원하는 만큼만 일을 해준다.
말하자면 디지털형 ‘부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디지털형 부업은 몇가지 점에서 아날로그형 부업과는 차이를 보인다.
몇년 전 IMF 위기가 닥쳤을 때 직장인들이 고용불안 때문에 부업삼아 가게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갑자기 회사에서 잘리는 것에 대비해 미리 준비를 해두자는 것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 자신의 전문 분야와는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된다.
전통적 부업의 경우 일정한 시간을 투자해야만 하는 시간제 보수의 성격이 강하다.
본업이 끝나면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일을 하는 것이다.
디자인 회사에서 디자이너로서 일하다 퇴근하면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우 정해진 시간 안에 강의를 해주어야 한다.
부업의 일차적 목적도 주로 경제적인 데 있다.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필요한 수준의 생활을 꾸려가기 힘들기 때문에 애써 부업거리를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IT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하고 있는 부업은 돈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부업을 통해 자기계발과 경력관리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절대 알리지 않지만,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될 때는 이력서에는 당당하게 경력으로 올린다.
한 컨설팅 회사에 다니고 있는 이아무개씨는 뜻하지 않게 부업거리가 생겨 수입도 얻고 경력관리에도 도움을 받고 있다.
그는 IT 업종에 뛰어들기 전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6년 동안 영업과 홍보 업무를 맡았다.
그런 경력이 밑받침되어 IT업계에서도 비교적 빨리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기업꼴을 갖춰가는 IT업체들로서는 회사의 세팅과 조직 구성, 운영의 노하우가 절실히 필요하던 때였다.
그가 한 소프트웨어 업체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친구가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면서 회사를 차리고 싶은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모르겠다며 도움을 청했다.
그는 오프라인에서 쌓은 다양한 영업과 홍보활동 경험, 그리고 온라인 업체에서 터득한 실무 지식을 바탕으로 몇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업체에게는 정말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설명이 끝나고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주머니에 고맙다고 사례금을 주는 거예요. 앞으로도 많이 도와달라는 거죠.” 그는 자신의 노하우를 포장해서 상품화할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됐다.
여기저기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밀려들었다.
주로 그가 그동안 관계를 맺어온 업체의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때로는 부업으로 얻는 수입이 월급보다 많기도 했다.
그렇다고 직장생활이 불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직장을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기획을 해주고, 영업을 해주고, 홍보활동도 해주고, 컨설팅도 해준다.
그런 일들이 결국은 그의 경력에 플러스가 되고 있다.
리서치 회사에서 일했던 노아무개씨도 그의 경력을 잘 알고 있는 업계의 지인들로부터 가끔 일거리를 받는다.
“해봤던 일이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는 않아요. 조금만 도와주면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제법 짭짤한 수익도 얻을 수 있죠.” 그 역시 일거리를 일부러 찾아나서진 않는다.
어디서 알았는지 도움을 요청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는 일이 주어지면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할 생각이다.
물론 지금의 직장을 포기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
잡코리아가 IT산업에 종사하는 332명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5명 가운데 1명은 부업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중 60% 이상은 본업과 연관된 부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직에 대비하거나 전직을 엿보기보다는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고 특기도 살리는 차원에서 부업을 하고 있다는 응답이 80%를 넘었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무기로 출발하는 벤처기업에서 다양한 실무경험과 창조적 기술, 조직운영 노하우를 요구하는 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유능한 사람의 능력을 잠시 사서 쓰겠다는 업체들이 있고,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상품화하겠다는 인재들이 있는 한 디지털형 부업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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