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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세계정복은 글로벌 표준화부터
[IT] 세계정복은 글로벌 표준화부터
  • 박기식(ETRI)
  • 승인 2001.02.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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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 표준화 선점 위해 각국 기업들 전쟁…기술과 마케팅이 핵심축
최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전기통신연합(ITU) 표준화 부문 의장단 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밤 늦게 호텔에 도착해 다음날 열리는 회의 안건을 상의할 일이 있어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도통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호텔 데스크에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06-48-○○○○’를 돌리면 된다고 했다.
서울에서 하던 식으로 지역번호 ‘06’을 빼고 눌렀던 것이다.


해외 여행에서 흔히 경험하는 이런 혼선은 시내전화를 걸 때 눌러야 할 전화번호를 국가마다 다르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화를 거는 방식이 ‘표준화’되지 않은 탓이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표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불편함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비용을 치러야 한다.

정보통신 분야에서도 표준화가 중요하다.
휴대전화에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우물 정’(#) 대신 ‘별표’(*)를 눌러 처음부터 다시 녹음해야 한다든지, e메일을 받긴 받았는데 내용을 전혀 읽을 수가 없다든지 하는 것은 표준화가 안돼 있기 때문이다.
표준화는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중요한 요소였다.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위대한 통치자들은 도량형이나 문자, 언어를 표준화시켜 나라의 발전과 융성을 이룩했다.
‘표준’이란 이처럼 여러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 사용하는 도구 따위를 하나의 방식으로 정한 다음 여기에 따르기로 하는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표준화는 자동차를 운전할 때 신호등 색깔에 따른 대응방식처럼 아주 단순한 것도 있지만, 통신방식처럼 매우 복잡한 것도 있다.
정보통신이 국가 경제의 기반산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80년대 이후부터 무형의 정보통신 프로토콜에 대한 표준화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정보통신 표준’이란 “여러 정보통신 주체들이 관련 기술을 이용해 의사전달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공동작업이나 결과의 공동활용 등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상호간에 준수하기로 한 약속”이다.
정보통신 표준화는 약속 자체를 정하는 작업, 약속을 정하기 위한 핵심기술에 대한 기초연구, 시험 및 검증, 제품이나 기기의 제조 및 서비스에 구현 따위를 포함한다.
최근 들어 정보통신 표준화가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국제화와 개방화가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만큼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통신을 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국제표준화 위한 치밀한 마케팅 필요 경제 역시 세계화되면서 이제 ‘최고’만이 경쟁력을 갖고 살아남을 수 있다.
세계 시장을 석권하거나, 아니면 몰락하는 양자택일적 구도가 펼쳐지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세계 최고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성공의 보증수표를 얻을 수 없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지구촌 표준으로 만들어야만 비로소 세계 시장을 차지할 수 있다.
G4팩시밀리(ISDN용 고속팩시밀리), 소니의 베타방식 VCR 등 기술은 최고지만 표준화에 실패해 시장에서 밀려난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많은 거대 회사들이 세계 표준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전쟁을 하듯 달려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통신이란 본래 두명 이상의 사람이 의사나 정보를 교환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교환을 원하는 사람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나고, 전달하려는 내용도 복잡해지면서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표준화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세계는 바야흐로 정보통신 표준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르네상스 시대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표준화에 따른 기술종속국이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표준화를 이끌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개발한 기술을 국제 표준화 무대에서 마케팅하는 치밀한 작업이 필요하다.
국제표준으로 반영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표준화의 수혜자가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멀티미디어 핵심 기술인 MPEG의 경우 국제표준에 반영된 1개 특허당 매년 100만달러의 로열티가 예상된다.
관련 제품의 생산 및 수출까지 생각하면 표준화 효과가 얼마나 큰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MPEG 표준의 전체 기술 반영 측면에서 10%를 차지하고 있어 표준 마케팅에 성공한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국가 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물론 반대 사례도 있다.
최근 국내 한 기업이 홈네트워킹과 관련해 일본 기업과 제휴한 것은 국제 표준화 사회의 지지를 규합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소니의 VTR 방식과 마찬가지로 우월한 기술이 반드시 국제표준으로 자리잡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우월한 기술도 마케팅을 통한 국제표준화 세력의 규합이 이뤄져야 한다.
고선명텔레비전(HDTV)의 표준화 역사는 더 극적이다.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한 아날로그 방식의 HDTV는 ITU에 표준안을 제출할 당시 시험방송까지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유럽이 정보가전 시장에서 일본의 입지가 강화될 것을 우려해 표준 채택에 반대하면서 일본은 자체 기술 축적에 만족해야 했다.
일본의 기술 개발에 자극받은 유럽은 ‘유레카95’(Eureka95)라는 컨소시엄을 구성해 아날로그 HDTV 기술개발에 8억5천만달러를 투입했다.
하지만 미국이 디지털 HDTV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나서자 유레카95에 거금을 투입했던 필립스와 톰슨이 디지털 HDTV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현재는 미국, 일본, 유럽이 제안한 각각의 디지털 HDTV 기술이 모두 ITU 표준으로 채택돼 있다.
이처럼 똑같은 기술에 대해 복수표준이 제정되면 이후의 마케팅이 성패의 열쇠를 쥐게 된다.
최근 우리나라 최대의 관심사인 차세대이동통신(IMT-2000)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룩한 기술을 바탕으로 또는 새로운 개념의 서비스를 요구하는 이용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표준 역시 여기에 맞춰 새로 생겨나고 점점 발전하게 된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기술이 표준화를 선도하는 게 아니라 표준화가 기술을 선도하는 관계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IMT-2000이나 MPEG이 모두 그랬다.
이런 점에서 표준화 참여는 지속적이고 전문적이어야 한다.
표준화에 장기적이고 전략적 관점에서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보통신 기술의 표준화는 각국 정부와 기업들이 미래의 운명을 걸고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제 독자적으로 국제표준화를 성공시키는 일은 기대하기 힘들다.
국제적 협력과 기술의 마케팅 노력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정보통신 표준화는 이미 생활 속에서 일상을 지배하고, 세계 시장을 좌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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