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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 디지털 가상세포
[테크놀로지] 디지털 가상세포
  • 김상연/동아사이언스
  • 승인 2001.10.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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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실험 새장 연 사이버생명 컴퓨터로 ‘유전자 회로’ 재현 자유로운 실험 가능케해… 국내에서도 연구노력 활발 ‘생명과학’ 하면 쉽게 떠오르는 것이 동물이나 미생물을 이용한 실험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컴퓨터가 이런 실험의 상당 부분을 대체할 전망이다.
컴퓨터 안에서 만들어진 인공 생명체인 ‘디지털 가상세포’가 성큼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디지털 가상 세포는 몇년 전 크게 인기를 모았던 다마고치와 비슷하다.
다마고치가 게임기 안에서 성장하듯이 가상세포도 컴퓨터 안에서 자란다.
과학자들은 가상세포에 물도 주고 영양분도 공급하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연구하는 것이다.
사람 몸 속에는 유전자가 있다.
이 유전자를 모두 밝혀 내겠다고 큰소리친 게 바로 게놈 프로젝트다.
유전자에서 효소나 호르몬 같은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유전자가 명령하면 단백질이 그 명령을 수행한다.
그 덕분에 우리가 살 수 있다.
이런 모든 과정을 ‘대사 회로’라고 한다.
생명체는 대사 회로가 정지하는 순간 죽는다.
가상세포란 대사 회로를 컴퓨터 안에 인공적으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가상세포는 마치 미생물처럼 대사 회로를 돌리며 그 결과물을 만든다.
가상세포를 딱딱하게 표현한다면 ‘생명현상을 그대로 흉내내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가상세포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있다.
1999년 미국 커네티컷대학 연구팀이 가상세포를 처음으로 만든 이후 미국 에너지부는 10년에 걸쳐 1억5000만달러를 투자해 ‘가상 미생물’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일본도 앞으로 10년 동안 매년 100억원씩 지원해 ‘E-셀’(전자세포)이라는 가상세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공학과 이상엽 교수가 최근 ‘맨하이미아균’이라는 미생물을 본딴 가상세포를 만드는 등 서서히 연구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가상세포가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을 생산하는 것도 아닌데, 가짜 생명체에 왜들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걸까. 그것은 가상세포에서 얻은 결과를 바로 현실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만들기 전에 컴퓨터에서 수많은 모델을 만들어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페니실린이 탄생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플레밍이 처음으로 페니실린이라는 물질을 발견한 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페니실린이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생물인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찾아내기까지 시간이 그만큼 오래 걸린 것이다.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서 미생물로부터 신약 물질을 발견했다거나 모유를 짜내는 젖소를 개발했다는 등의 뉴스를 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다.
발견이나 개발과 실제 대량생산 사이에는 상당히 깊은 골짜기가 놓여 있다.
가상세포는 이 간격을 크게 좁혀줄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A라는 물질이 있다고 치자. 생명체 안에서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A가 만들어진다.
가상세포를 이용하면 실험 없이도 어떤 과정을 죽이고 살려야 하고,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A가 만들어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신약개발 연구에 드는 시간이나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가상세포를 이용해 미생물에서 필요없는 반응을 죽이고 특별한 유전자를 늘린 결과 원하는 물질을 10배나 더 많이 생산해냈다.
물론 가상세포가 가야할 길은 아직 험난하다.
가상세포를 만들려면 미생물이 갖고 있는 모든 유전자를 찾아야 하고, 그 유전자에서 만들어진 단백질들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키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완벽하게 대사 회로를 알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미생물은 아직 유전자 분석조차 끝나지 않았다.
대사 회로를 다 알아냈다고 해도 가상세포의 결과가 실제 미생물에서 그대로 나타난다고 보장할 수 없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과학자들은 미생물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 암이나 태아의 상태까지 컴퓨터에서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동물 실험의 천국’으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불명예도 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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