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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품 매장 문턱은 닳아빠지고
2. 명품 매장 문턱은 닳아빠지고
  • 이미경 기자
  • 승인 2001.10.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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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장벽은 너무나 높았다.
“매장 공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저희 원칙입니다.
딸깍.” 샤넬이나 아르마니 같은 명품 매장의 일일 판매원이 되어 현장감 있는 취재를 해보겠다는 기자의 ‘물정 모르는’ 각오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국내 인구의 3% 안팎이라는 ‘진짜’ 명품 고객들과의 근접조우는 ‘노출을 꺼리는 상류층 고객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는 명품 마케팅 1조 1항에 밀려 물거품이 됐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고객으로 ‘위장’한 다음 매장이 밀집돼 있는 곳으로 달려가 ‘잠입 취재’를 하는 길뿐이었다.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의 명품관은 1층 잡화매장과 함께 있지만 완전히 독립된 구조로 되어 있다.
바닥에는 매끄럽고 고급스런 검은색 대리석이 깔리고, 높고 둥근 천장에 매달린 금빛 샹들리에가 눈부시다.
미로를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요술궁전을 연상케 하는 이곳은 1996년부터 명품 고객들에 대한 ‘원스톱 서비스’를 위해 크고 작은 공사를 거듭한 끝에 오늘날의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명품 매장으로 맹위를 떨쳤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난 뒤 현대백화점은 갤러리아백화점과 함께 이 분야의 최강자로 꼽히고 있다.


오후 두시께, 세일이 한창인 백화점쪽은 떠들썩했지만 명품관 부근은 비교적 한산했다.
그러나 국내에 수입된 명품 브랜드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는 루이뷔통 매장에는 8~9명의 중년 여성들이 막 들어온 신상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주거지역과 가까운 까닭에 현대백화점 본점에는 30대 이상의 고객이 많다.
상점가에 자리한 갤러리아백화점이 20대 고객으로 북적거리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근처에 있는 직원에게 물으니 “4시30분에서 7시 사이에 손님이 가장 많다”고 했다.
시간은 넉넉하니, 평소에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고가 제품들을 마음껏 구경하기로 했다.
이 요술궁전에는 대체 얼마나 비싸고 좋은 물건들이 있는 것일까?
현대백화점 명품관 순례는 루이뷔통 매장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17개 매장을 차례로 둘러보면 끝이 난다.
방수가 완벽하고 물에 잘 뜨기 때문에 여행 중 배가 침몰했을 때 여러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해서 명성이 높은 ‘루이뷔통’은 현재 이곳 명품관에서 매출 1위를 달리고 있다.
루이뷔통 매장을 등지고 대리석 복도를 따라 걷노라면, 너무 편안해서 한번 신으면 벗기 싫어진다는 ‘페레가모’ 구두와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용 왕관을 만들었다는 ‘쇼메’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양탄자를 펴놓고 우유만 먹여 기른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다는 600만원짜리 ‘에르메스’ 가방을 만날 수 있다.


명품관 순례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모조품 가격대만 해도 3만~50만원으로 다양하다는 ‘프라다’다.
얼핏 단순하고 밋밋해 보이는 이 가방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어 서성거리고 있을 때 20대 중반의 여성들이 왈칵 매장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프라다 가방을 사기 위해 또래 친구들끼리 계모임을 한 눈치였다.


한국인의 명품 선호 경향은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한다.
삼성패션연구소 서정미 수석연구원은 “일본에서는 외출 때 꼭 한가지 명품만은 입거나 드는 ‘1점 호화주의’가 유행하는 데 비해 한국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차려입기를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일상적으로 명품을 구입하는 소수 상류층 외에도 다수의 ‘평민’들도 명품에 대한 갈망이 이처럼 뜨겁다면, 명품의 소비자층은 예상보다 두텁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젊은 세대일수록 경제력에 상관없이 명품 구입을 즐긴다고 하니, 명품관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맹위를 떨칠 수 있는 여건은 충분한 것이다.



명품 사면 내 가치도 업된다?
실제로 현대백화점 명품관은 IMF 사태 때 매출이 오히려 늘었다.
당시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됐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고, 순식간에 치솟은 환율 때문에 수입 재고품들이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아지는 현상이 빚어져 명품관은 예상치 않았던 ‘IMF 특수’를 누렸다.
지난 6년 동안 명품관을 담당해온 현대백화점 윤시영 대리는 “당시 이곳에서 물건을 대량 구입한 뒤 일본 보따리 장수들에게 넘겨 큰 돈을 번 얌체족도 있었다”고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오후 5시가 넘어서자 명품관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루이뷔통 매장에서 일하는 7명 가량의 직원들은 저마다 한두명씩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수첩에 연신 무언가를 끄적이는 기자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덕택에 매장을 순례할 때보다는 좀더 적극적으로 이곳저곳 기웃거릴 수 있었다.
1만원짜리를 뭉치로 내밀어 값을 치르는 ‘화끈한’ 중년 여성도 보았고, “시즌마다 꼭 한가지씩 새로운 아이템을 구입한다”는 은퇴한 교장선생님도 만났다.
그는 “사람들이 명품을 구입하면 자신의 가치도 그만큼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명품 선호현상에 대해 촌평을 하기도 했다.


취재가 끝날 무렵 다시 만난 윤시영 대리는 “명품관의 정확한 매출액은 밝힐 수 없다”면서도 “지난해에 비해 매출이 소폭 증가했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 명품관의 매장 수와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단순비교를 하는 건 무리지만, 지난해 같은 시기에 진행된 세일 기간의 판매량만 따진다면 매출이 30% 정도 늘었다고 했다.
결국 고가의 물품은 경기의 영향을 그닥 받지 않는다는 얘기다.
아무리 무서운 불황이라도 높고 견고한 명품의 아성은 무너지지 않는 모양이다.
윤시영/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명품관 대리 “불황에도 기본은 된다” 인사를 나누고 첫질문을 시작했을 때 윤시영 대리의 전화벨이 울렸다. “고객님, 해결됐거든요. 매장 앞으로 나가겠습니다.” 윤 대리는 서둘러 자리를 뜬 지 20여분 뒤에 돌아오더니 서랍을 열고 묵직한 서류묶음을 꺼내 보여줬다. ‘소비자 피해보상 규정’이라는 제목의 복사물이었다. 명품관 담당으로 일한 지 올해로 6년이 된 그가 가장 요긴하게 쓰는 서류라고 했다. -법령집을 복사해놓아야 할 만큼 까다로운 고객이 많은가? =고객이 까다롭기 때문이 아니라 입점한 브랜드들의 규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좀전에 만난 고객은 시계를 구입했는데, 세번 고장이 나고 이번에는 아예 멈췄다. 당연히 교환이나 환불이 돼야 하는 상황인데도 업체쪽에서 좀처럼 응하질 않더라. 법령집에 시계에 대한 조항이 나오길래 이를 근거로 설득할 수 있었다. -고가 제품이라 서비스도 남다를 줄 알았는데…. =아직은 외국 업체의 한국 고객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외국 본사의 까다로운 규정을 근거로 서비스를 충분히 하지 않는 국내 수입업체를 닥달하다 보니 ‘트러블 메이커’라는 별명도 얻었다. 고객 입장에 서서 이런 문제를 조율하는 게 가장 어렵다. -명품관은 불황기에 오히려 잘된다는 말이 있다. =불황 때 장사가 더 잘될 리야 있겠는가.(웃음) 다른 부문에 비해 타격이 적은 편이라고 한다면, 그건 맞는 말이다. IMF 사태 때 같은 경우는 국내 경기에 비해 매출이 좋았던 것이 사실이다. 명품관뿐 아니라 본점의 다른 매장들도 IMF 때 매출이 늘었던 것으로 안다. 본점(압구정점)은 입지조건상 상류층을 주요 타깃으로 하는 고급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다른 곳에 비해 불황을 덜 타는 편인 것으로 안다. -명품 매장을 유치하려는 백화점들이 늘고 있다는데, 고급품이 그렇게 잘 팔리나. =수요가 크게 증가해서라고 보긴 어렵다. 상류층 고객을 확보하고, 전체적인 이미지를 고급화하기 위한 전략이겠지. 백화점 입장에서 보면 명품 매장은 마진이 낮은 편이다. 게다가 업체들은 핸드백만 팔 때는 45평, 신발도 팔면 60평, 이런 식으로 매장 규격에 엄격한 조건을 요구한다. 수요층은 그대로이고 수입물량도 한정적인데 매장 수 증가로 경쟁이 치열해지면, 명품 한매장을 유치하기보다 같은 면적에 장사 잘되는 업체 여러 곳을 입점시켜서 얻는 이익이 더 커지는 시점이 올 수도 있다. 실제로 일본 ‘소고백화점’이 이런 이유로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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