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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프로] 김진섭 / 소믈리에
[나는프로] 김진섭 / 소믈리에
  • 이희욱 기자
  • 승인 2001.1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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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깊이를 읽는 와인 전문가 맥주와 소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소믈리에란 그리 낯익은 말이 아니다.
특히 ‘와인’이란 술이 주는 도회적이고 지적인 분위기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지하 1층의 와인숍 ‘에노테카’에서 만난 김진섭(35)씨는 이러한 이미지와 거리가 있었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깔끔한 검정색 정장에 버터 냄새 나는 억양의 ‘영국풍 신사’를 상상했는데, 그는 수수한 옷차림에 호감을 주는 밝은 미소와 따스한 목소리를 지녔다.
이런 그의 모습은 와인의 또다른 세계를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다.
‘와인은 일부 상류층이나 마니아들만 마시는 술’이라는 생각은 선입견이 아닐까? 소믈리에란 ‘와인감별사’를 이르는 프랑스어로, 원래는 중세 유럽의 식품감별사를 뜻하는 ‘Somme’가 19세기 들어 와인이 대량 소비되면서 와인감별사를 지칭하는 ‘Sommelier’로 변형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와인 맛을 감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와인의 품목 선정과 관리뿐 아니라 요리·장소·사람별로 가장 적합한 와인을 골라 추천하는 일까지 도맡아 하는 와인 전문가라 할 수 있다.
김진섭씨는 소믈리에 경력이 그리 길지 않은 편이다.
1995년 한화그룹 공채로 입사해 마케팅 부서에서 업무를 시작한 김씨는 우연한 기회에 갤러리아백화점에서 추진하는 와인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원래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농산물 유통을 전공한 경력이 있는데다,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한 ‘에노테카’가 일본 와인 유통 브랜드라는 점 때문에 그는 자연스레 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김씨는 99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인 전문가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국내 최초로 갤러리아백화점 안에 와인 전문점 ‘에노테카’를 열었다.
그는 지금 여기서 매니저로 일한다.
백화점 문화센터의 단골 강사 김진섭씨의 경력이 짧다고 하지만, 우리의 와인 역사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나라에 와인이 소개된 때는 70년대 중반이다.
일부 호텔의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소수 사람들만 즐기던 와인은 80년대 중반에 수입 개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위스키나 꼬냑 등에 밀려 주류 백화점의 한쪽 구석에 얌전히 진열돼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인을 ‘전문점’ 형태로 독자적으로 선보인 것은 김진섭씨의 와인 전문점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다른 백화점들도 와인 전문 매장을 잇따라 개설해 지금은 백화점은 물론 일반 레스토랑에서도 어렵지 않게 와인을 접하고 음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유명세도 꽤 치렀다.
한 케이블TV의 요리방송에 9개월간 출연하기도 했으며 기업체의 VIP 고객이나 항공사 스튜어디스를 대상으로 강좌를 열기도 했다.
지금은 백화점 문화센터의 단골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와인 얘기로 들어가보자. 김진섭씨가 눈을 반짝거리며 와인 강의를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와인의 종류는 색깔에 따라 크게 세가지로 나눕니다.
적포도로 만드는 레드와인과 청포도를 주로 사용하는 화이트와인, 두 포도를 섞거나 적포도의 즙이 조금만 착색됐을 때 뽑아내는 로제와인이 그것이죠.' 세가지라면 생각보다 다양한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뒤이은 그의 말에 기가 질린다.
'또 당분에 따라 나누면 드라이와인과 스위트와인, 그리고 중간 단계인 미디엄드라이와인이 있어요. 용도에 따라서는 식사 전에 마시는 애피타이저와인, 식사와 함께 마시는 테이블와인, 식후에 마시는 디저트와인이 있습니다.
또 탄산가스 포함 여부에 따라서는….' 종류가 많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기준에 따라 분류 또한 이렇게 다양할 줄은 미처 몰랐다.
우선 색깔에 따른 구분이 일반적이라는 얘기를 듣고,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의 차이를 물었다.
'가장 큰 차이는 떫은맛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레드와인에는 떫은맛, 단맛, 신맛과 과일 맛이 함께 포함돼 있어요. 반면 화이트와인은 떫은맛이 거의 없고 단맛이 좀더 강하죠.' 한잔의 와인에 여러가지 맛이 들어 있다는 얘기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단맛이라고 해서 설탕처럼 달콤하기만 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와인의 단맛에는 깊이가 있습니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미네랄감과 과실 농축된 맛까지 어우러져 와인만의 독특한 맛을 내는 것이죠.' 그토록 다양한 와인의 맛을 감별해내고 가장 적합한 와인을 고객에게 추천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김진섭씨는 사람에게도 와인과 같은 향기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와인은 제각기 개성이 있습니다.
‘맛없는’ 와인은 없어요. 사람도 저마다 다른 맛과 향기가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와인을 사려는 손님의 취향이나 와인을 마시는 장소와 이유, 함께 먹는 요리나 예상 경비 등을 충분한 대화를 통해 파악한 뒤 거기에 꼭 맞는 제품을 추천하려고 노력합니다.
' ‘소믈리에’란 직업이 왜 필요한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와인, 오감으로 마신다 고객의 다양한 취향과 분위기에 맞는 와인을 추천하다 보니, 나름대로 고객을 판단하는 노하우도 생겼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와인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레드와인의 떫은맛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단맛이 강한 화이트와인을 선호하는 편이죠. 그러다 단맛에 싫증이 나면 부드러운 느낌이 강한 화이트와인으로 옮겨갑니다.
다음에는 부드러운 맛이 강한 레드와인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떫은맛이 강한 레드와인으로 되돌아가는 게 보통입니다.
' 결국 선호하는 와인의 종류에 따라 그 사람의 ‘와인 연차’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미세한 맛의 차이를 감별하는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김진섭씨는 하루에도 몇잔씩 와인을 마신다고 한다.
질릴 만도 할 텐데 오히려 '와인을 마실 때 삶의 행복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는 어쩔 수 없는 소믈리에다.
'와인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합니다.
와인의 에메랄드빛에 눈이 취하고, 잔을 지그시 돌리면서 은은한 향내에 코가 반하고, 혀 끝에 닿는 맛에 입이 매료됩니다.
크리스털 잔을 부딪칠 때 맑은 울림이 귀를 간지럽히고, 여기에 은은한 음악과 연인이 함께하면 최고의 행복이 따로 없죠.'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그가 말을 잇는다.
'와인은 시거와 함께 즐길 때 더욱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거의 부드러운 향기가 와인과 어우러져 옆사람에게도 감미로운 행복을 전달해주거든요.' 이쯤되면 문외한인 사람도 와인의 매력에 절로 빠져들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와인 중 50% 이상은 프랑스산이다.
특히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보졸레 지구에서 생산되는 햇포도주가 유명하다고 한다.
‘보졸레 누보’라 불리는 이 와인은 프랑스 법령에 따라 해마다 11월 셋쨋주 목요일 0시에 출시된다.
한국 시간으로는 오는 11월15일이다.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출고 당일 0시 정각에 와인 마니아와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대규모 축제가 열린다.
우리나라에서도 15일 자정, 특별 행사를 마련할 예정이다.
김진섭씨는 '에노테카에서도 방문객을 대상으로 무료시음회 등 이벤트를 마련할 것'이라고 귀띔한다.
하지만 국내 주류시장 전체를 두고 볼 때 와인 소비량은 전체 시장의 2%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IMF 사태 직후 수입량이 급감했다가 올해 들어 예년 수준으로 회복된 상태다.
2만~3만원대의 실속형 제품부터 수백만원에 이르는 최고급 와인까지 다양한 제품이 출시되어 있지만, 전반적으로 맥주나 소주에 비해 비싸다는 점이 와인 대중화의 걸림돌로 지적된다.
그래서 김진섭씨는 ‘와인의 대중화’가 꿈이라고 한다.
'가격이 좀더 내려가고 와인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 가을 햇살을 닮은 조명 아래 두뺨이 와인빛으로 물들며 수줍게 미소짓는 그의 얼굴에서 가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소믈리에가 되려면

국내에선 아직까지 소믈리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편이다.
보건복지부에 정식 직업으로 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은데다, ‘레스토랑 웨이터’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최근 1~2년 사이 와인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소믈리에 관련 사설 강좌나 전문 교육기관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공공 교육기관으로는 중앙대학교 산업교육원의 소믈리에 컨설턴트 과정과 세종대학교 사회교육원의 와인컨설턴트·마스터 소믈리에 과정이 대표적이다.
또 보르도 와인 아카데미, 무똥카데 와인 스쿨, 서울와인스쿨 등 사설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와인과 소믈리에 관련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소믈리에협회 www.sommeliercoree.com도 10여년 전부터 발족돼 50여명의 회원을 중심으로 소믈리에 양성과 와인 대중화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소믈리에가 되기 위해서는 외국어 공부가 필수적이다.
직업 특성상 외국인과 접촉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다 와인 관련 정보를 꾸준히 습득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는 기본이며 프랑스어나 독어, 이탈리아어 등 제2외국어를 함께 배워두면 큰 도움이 된다.
연봉 수준도 높은 편이다.
경력 5~10년차의 소믈리에의 경우 30대 초중반 정도의 연령에 3500만~4천만원 정도의 수익을 올리는 편이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전문대학과 유사한 소믈리에 전문학교가 있으며, 1~2년 과정의 전문학원도 상당수다.
젊은이들 사이에 선망의 대상인 21세기 유망직종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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