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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미국 의회 "통신시장은 못내줘"
[포커스] 미국 의회 "통신시장은 못내줘"
  • 최욱(와이즈인포넷연구원)
  • 승인 2000.09.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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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T의 베리오 인수 이어 도이체텔레콤도 반대...'국가안보'가 키워드
최근 외국 통신업체들의 미국시장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미국의 ‘거부감’이 노골화하고 있다.
미국은 특히 외국 정부가 다수 지분을 보유한 통신업체들의 미국 통신업체 인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미 미국 상원은 어니스트 홀링스(Earnest Hollings)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30명의 의원들이 ‘외국정부가 2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통신업체의 미국 통신업체 인수를 금지’하는 이른바 ‘홀링스 법안’을 제출했다.
하원에도 같은 법안이 올라가 있다.


미국이 이처럼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부에서는 외국자본 진출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을 우려한 미국 통신업계가 의회에 외국기업 진출을 규제할 것을 건의했다는 주장을 편다.
하지만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미국의 거부감 뒤에는 국가안보라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익이 숨어 있다.
“외국 정부에 국가안보 노출시킬 순 없다” 미국 의회의 이같은 움직임은 지난 5월 일본 최대 통신사업자인 NTT가 미국 인터넷 서비스업체이자 웹 호스팅업체인 베리오(Verio)를 인수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촉발됐다.
지난 7월 유럽 최대 통신사업자인 독일 도이체텔레콤(Deutsche Telekom)이 미국 이동통신 사업자인 보이스스트림(VoiceStream) 인수를 추진하면서 도화선이 타들고 있던 때였다.
현재 도이체텔레콤은 독일 정부가 58%의 지분을, NTT는 일본 정부가 5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연방수사국(FBI)을 비롯한 미국의 국가안보기관들은 그동안 외국 통신업체들이 미국 통신업체들을 인수하면 네트워크에 대한 통제가 어렵다는 우려를 제기해왔다.
특히 베리오와 같은 인터넷 업체들의 경우 미 연방통신위원회(FCC)의 규제를 받지 않으므로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국가안보가 외국 기업, 그것도 외국 정부가 다수지분을 보유한 업체의 손에 들어간다고 상상해보라. 현재 NTT의 베리오 인수는 타결국면에 접어든 상태다.
백악관이 “FBI가 제기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NTT의 베리오 인수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NTT는 “베리오 주식 95.6%를 예정대로 확보했으며 9월 초까지는 인수를 마무리 지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그러나 NTT가 베리오를 인수하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험난했다.
NTT는 베리오 인수를 승인받기 위해 FBI, 법무부,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 등과 수주간에 걸친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이 자리에서 FBI와 법무부는 “도청을 하거나 수사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미국 정부가 베리오의 인터넷 기간망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FBI는 “도청은 스파이 활동이나 범죄행위 조사에 필요하기 때문에 NTT가 베리오를 인수하더라도 미국 정부의 이러한 활동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안보기관은 베리오가 거대 ISP업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베리오는 미국에서도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해주고 있는데, 스탠더드앤푸어스(S&P)의 500대 기업 중 약 20%가 고객이다.
안보기관들은 “40만개 가량의 기업 사이트를 운영하는 베리오를 외국기업이 인수할 경우 국가안보에 허점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NTT는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사실상 미국 정부의 요구를 수용했다.
도이체텔레콤, 넘어야 할 장애 산적 이처럼 지난했던 NTT의 베리오 인수 과정을 이제는 도이체텔레콤이 밟고 있다.
홀링스 상원의원은 도이체텔레콤의 보이스스트림 인수 소식이 전해지자 윌리엄 켄나드(William Kennard) FCC 의장에게 편지를 보내 “이번 인수가 미국법에 저촉된다”고 주장했다.
켄나드 의장은 답장에서 “도이체텔레콤의 보이스스트림 인수가 미국 내에서 경쟁에 위배되지는 않는지, 국가안보 위협은 없는지, 그리고 미국법 및 FCC 규정에는 저촉되지 않는지 등을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행 미국법은 홀링스 의원의 주장대로 외국정부가 2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외국업체의 미국 통신사업 라이선스 취득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은 ‘만약 그 인수가 공익에 도움이 된다면 라이선스 취득 금지를 철회할 수 있는’ 재량권을 FCC에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외국기업의 미국 통신업체 인수를 용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의회에 새로 제출된 법안은 이런 예외를 없애 통과될 경우 오는 10월부터 1년 동안 외국정부가 2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외국업체의 미국 통신사업 라이선스 취득이 불가능하게 된다.
현재 도이체텔레콤은 한 고비를 넘어섰다.
미국 법무부가 최근 보이스스트림 인수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FCC와 CFIUS, 그리고 보이스스트림 주주들의 승인을 남겨두고 있어 아직은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무엇보다 강경입장을 고수하는 미국 의회를 설득해야 한다.
분석가들은 “NTT의 베리오 인수승인을 볼 때 도이체텔레콤의 보이스스트림 인수 역시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으나,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기엔 아직 이르다.
외국정부, “WTO 통신협정 탈퇴”, 미국 의회의 이런 움직임에 외국 정부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EC)는 “만약 미국 의회가 보이스스트림 인수를 반대한다면 이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WTO 제소는 물론 최악의 경우 WTO 통신협정에서 탈퇴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히라바야시 고조 일본 우정성 장관은 최근 샬린 바세프스키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에게 “미국 의회에서 심의중인 법안이 전기통신사업 분야에 대한 외자규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WTO 규정에 위배될 우려가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는 특히 NTT를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NTT의 자회사인 NTT도코모가 현재 미국 SBC-벨사우스(Bell South)의 이동통신 합작사와 제휴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도 비판적 의견이 고개를 들고 있다.
NTT의 베리오 인수에 FBI가 개입했을 때도 일부 법률가들은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 정부가 그 동안 통신이나 항공, 그리고 국방산업 분야에서 외국업체의 미국업체 인수를 조사한 적은 있으나 이번처럼 국가안보 문제를 쟁점으로 부각시킨 적은 없기 때문이다.
법률가들은 “FBI가 수사나 도청을 위해 인터넷 네트워크에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번 일이 인터넷 분야에서 법률적 강제가 이뤄졌다는 선례를 남기지나 않을지 우려된다”고 말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의회 내부에서도 비판이 일고 있다.
하원 통신소위원회 일부 위원들은 청문회에서 “법무부와 FCC, 그리고 다른 통신규제기관들이 국가안보를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입법안을 도입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라며 “필요하다면 입법안 대신 무역대표부가 외국 정부를 설득해 통신업체 지분을 낮추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외국 통신업체의 미국시장 진출을 놓고 미국 정부와 의회, 그리고 외국 정부가 신경전을 벌이면서 문제는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문제가 WTO로 이어질 경우 각국이 통신산업을 둘러싸고 통상마찰을 일으킬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은 지난날 유럽이나 아시아에 통신시장을 개방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이제 유럽을 비롯한 외국 통신업체들이 미국시장 진출을 위해 인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자 국가안보를 구실로 이를 저지하거나, 여러 조건들을 전제로 인수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이 도이체텔레콤의 보이스스트림 인수를 어떻게 결론지을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일본 NTT가 SK텔레콤에 자본출자를 추진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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