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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EO 인력시장 ‘여명’
1. CEO 인력시장 ‘여명’
  • 이원재
  • 승인 2001.04.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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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기업·대기업 전문경영인 영입 활발, 상품가치 높이려는 경영자도 증가
“아무도 안 한다고?” 헤드헌팅 업체 유니코서치 유순신 사장은 혀를 내둘렀다.
한 외국계 솔루션 업체로부터 의뢰받은 CEO 영입을 추진하고 있던 중이었다.
대우는 연봉 3억5천만원에 인센티브 100%. 최고연봉 7억원, 그것도 스톡옵션이나 주식이 아닌 현금이니 대기업과 벤처기업을 막론하고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접촉한 후보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것이다.


물론 후보자들은 모두 국내에서는 쟁쟁한 스타급 CEO들이었다.
매스컴에 알려진 성공신화도 하나둘쯤은 갖고 있는 인기인들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선망하는 외국계 기업에다 국내 최고 대우인데? 이렇게까지 콧대가 높을 줄이야.그러나 이들이 말한 거절 이유 속에는 그저 ‘높은 콧대’만을 탓할 수 없는 뼈가 숨어 있었다.
“대우는 좋네요. 하지만 그 업종에서는 후발업체입니다.
지지부진할지 모르는 기업에 가서 지금까지 쌓아온 ‘정상급 경영인’ 이미지를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 인기관리를 하겠다는 이야기일까? 유 사장은 무릎을 탁 쳤다.
그들은 이제 ‘불러주는 곳으로 가서 돈을 받고 일해주는’ 경영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CEO 시장’의 한 상품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 단기적 연봉보다는 장기적 브랜드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동안 척박했던 CEO 시장이 국내에서도 열리고 있는 모양이구나.” 전문경영인 전성시대 CEO 인력시장이 여명을 맞고 있다.
그동안 외국기업 한국법인이나 회생이 필요한 부실기업, 일부 벤처기업 등 일부에서만 눈에 띄던 CEO의 외부영입 움직임이 꽤 규모가 큰 상장·등록 법인이나 대기업에서까지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다 스스로의 부가가치를 높여 CEO 시장에서 상품화하려는 경영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수요와 공급 양쪽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IMF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CEO 시장이란 말조차 낯설었다.
대기업 계열사 최고경영자는 대부분 그룹 수뇌부에서 파견한 특사이거나 계열사 최고경영자 사이의 순환보직, 또는 기업 내부승진으로 선임됐다.
새로 기업을 설립하거나 인수했을 때도 오너의 지휘권이 미칠 수 있도록 그룹 수뇌부 인사가 파견되는 게 보통이었다.
중소기업은 거의 절대적 오너경영 체제를 유지했다.
특정 오너 휘하가 아닌 전문경영인이 이 시장에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IMF로 많은 기업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고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에 돌입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채권단이나 법원이 직접 경영할 수는 없는 형편이니 당연히 기업을 단기간에 살릴 수 있는 전문경영인 CEO를 찾게 됐다.
96년부터 신원 기획조정실장을 지내면서 일찍부터 기업구조조정과 회생과정을 경험했다는 점을 평가받아 99년 쌍방울 법정관리인으로 영입된 백갑종 사장, 삼성종합화학 사장을 지낸 뒤 워크아웃 대상 1호인 고합그룹 CEO로 긴급수혈된 박웅서 사장 등 스타급 소방수들도 등장했다.
개발자들이 경영하다 어려움에 봉착해 ‘아래아한글 개발 포기 및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에까지 다가섰던 한글과컴퓨터에 98년 투입된 전하진 사장은 부실을 처리한 뒤 인터넷기업으로의 변신까지 외치면서 스타급 소방수의 반열에 들었다.
99년께부터 불기 시작한 벤처기업 창업 붐은 여기에 힘을 보탰다.
대부분 기술개발자들이 창업한 벤처기업들은 개발기를 거쳐 마케팅과 재무관리가 필요해질 때부터 외부에서 전문경영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 중 몇몇은 아예 CEO 자리를 고액연봉을 주고 데려온 금융권이나 컨설턴트들에게 내줬다.
정부관료 출신이나 대기업 간부 출신의 노회한 경영인들도 네트워크에 목마른 벤처기업들에게는 대환영이었다.
CEO 수요가 폭증해 시장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초 상장·등록기업 CEO 교체에서 보여지는 양상은 또 다르다.
더이상 ‘회생’이 가장 큰 과제인 부실기업이나 경영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초기 벤처에만 CEO가 영입되는 모습이 아니다.
비교적 규모가 크고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기업들에서도 전문경영인 CEO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인다.
IMF 뒤 워크아웃 상태에 빠졌다가 지난해 10월 세원텔레콤에 인수된 거래소 상장기업 맥슨텔레콤은 그 대표적 사례다.
3월16일 주주총회를 연 맥슨은 신임 대표이사로 김광래(56) 감사를 선임했다.
김 대표는 이전에 제일은행 한국제일투자 등 제일은행 계열 금융사에 몸을 담아오다 지난해 맥슨텔레콤 감사로 영입됐다.
인수합병 뒤에는 주로 인수기업이 피인수기업에 CEO를 보내 구조조정을 주도하게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외의 선택이라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게다가 대부분 통신관련 중소·중견기업들이 전문경영인을 CEO로 선임하더라도 기술자 출신이 주류라는 점에서 금융권 출신의 영입은 특이해 보인다.
외부에서 금융전문가를 수혈해 내부에서 1년여간 검증기간을 거친 뒤 CEO로 앉힌 셈이다.
매출액 2700억원의 ‘무거운 기업’인 맥슨텔레콤쪽은 이 색다른 선택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전 대주주의 기술지상주의가 불황기를 맞아 기업을 워크아웃에까지 들어가게 하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이런 기억은 당분간 재무를 아는 CEO가 필요하다는 요구로 이어졌다.
그래서 금융전문가를 찾은 것뿐이다.
” ‘굴러온 돌’과 ‘박힌 돌’을 가르기보다는 ‘어떤 CEO가 필요한가’라는 단순한 질문에 대답한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대성산업, 건설증권, 온세통신, 삼영열기 등도 전문경영인 CEO 영입 대열에 동참했다.
전문성을 찾는 변화의 조짐은 도통 먹히지 않을 것 같던 대기업쪽에서도 보이기 시작한다.
한솔텔레컴은 3월12일 주주총회를 열고 신임 대표이사에 유화석 전 삼성SDS 상무를 선임했다.
계열사 19개에 재계 14위의 그룹이 계열사 CEO를 외부에서 영입한 것이다.
한솔그룹 관계자는 “주력업종이 제지쪽이라 IT쪽은 그룹 내부에 인재가 없다고 판단해 외부에서 영입한 것”이라는 단순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특정 경영자가 건설에서 증권으로, 제조업에서 인터넷으로 종횡무진 계열사 CEO 자리를 번갈아 꿰차도록 하던 이전 재벌 계열사 CEO 선임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대주주 간섭 등 걸림돌 여전 CEO 시장의 확대는 이제 막을 수 없는 대세라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다국적 인사조직 컨설팅 업체인 타워스페린 서울법인 박광서 사장은 굴뚝기업이든 벤처든 가리지 않고 ‘알맞은 CEO를 찾아달라’는 대주주쪽 의뢰를 받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말한다.
“내부인이든 외부인이든 가리지 않고 알맞은 CEO를 뽑겠다는 분위기는 이미 상당 부분 형성돼 있다.
오히려 문제는 적당한 인물이 공급되지 않는다는 데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 이런 흐름을 거스르려다 낭패를 보는 기업을 보면 대세는 좀더 분명하게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얼마 전 대기업의 한 분사기업에서 벌어진 일이다.
대기업에서 잘 나가던 한 팀장이 CEO로 선임됐다.
외국계 펀드 500억원 규모 투자도 예정돼 있었다.
대기업 후광에다 외국계 투자까지 얻었으니 날개를 단 듯했다.
그런데 ‘팀장급 CEO’로는 미덥지 않았던지 모기업에서 갑자기 전무급을 CEO로 내려보냈다.
기존의 팀장급 CEO는 불만을 품고 사표를 내던졌다.
이때까지도 대기업쪽에서는 문제를 실감하지 못했다.
외국계 펀드쪽에서 ‘투자를 취소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나서야 땅을 쳤다.
물론 아직 삼성, 현대, LG, SK 등 오너 지배 아래의 재계 선두그룹들에게 외부 CEO 영입은 먼 얘기처럼 보인다.
외부에서 수혈된 CEO가 오히려 낭패를 봤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래서 한국에는 CEO 시장이 활성화하기 어려운 문화적 이유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HR코리아 한재욱 부사장은 “영입 CEO들은 조직구성원들의 반발이나 대주주 간섭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중도하차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내부에서 전문경영인을 육성하는 게 한국적 상황에서는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휴렛팩커드는 99년 7월 루슨트테크놀러지 부사장이던 칼리 피오리나를 CEO로 영입하기 위해 8개월간 400명의 후보자를 물색해 검토했다고 한다.
20세기 최고경영자라는 칭송을 받는 제너럴일렉트릭(GE) 전 회장 잭 웰치는 4년간의 후계자 선정작업을 거쳐 3명의 후보자를 검토하다가, 지난해 11월 제프리 이멜트를 차기 회장으로 최종지명했다.
내부에서 뽑든 외부에서 뽑든 그 중요성과 시장원리를 인정하는 점만은 배울 만하다.
한국에서도 CEO시장의 규모와 질이 얼마나 빨리 나아지느냐의 열쇠는 ‘CEO 수요자’인 오너들의 의식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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