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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⑬ 발렌티노 가라바니
[패션] 디자이너/⑬ 발렌티노 가라바니
  • 신수철/ (주)두경 대표
  • 승인 2001.11.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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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패션의 자존심 1932년 5월11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북부지방 보게라에서 태어난 발렌티노 가라바니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예술적인 기질을 드러내며 패션에 관심을 보였다.
일찍이 파리를 꿈꾸며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한 그는 17살이던 49년에 마침내 패션의 중심지 파리에 입성했다.
발렌티노는 국제양모협회 주최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입상하면서 패션 디자이너로서 첫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이 대회는 이후 이브 생 로랑과 칼 라거펠트 등 유명 디자이너의 등용문으로 떠오른다.
대회 입상을 계기로 발렌티노는 패션하우스인 ‘장 드세’에서 5년간 일을 배웠다.
57년 그곳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기라로시와 함께 일을 시작하며 패션과 비즈니스에 본격적으로 눈을 떴다.
59년 로마로 돌아온 발렌티노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120여종의 디자인을 선보인 자신의 아틀리에를 비아 콘도티에 열었다.
전설적인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그의 화이트 드레스를 주문해 국제 영화제에 나갔고, 이것은 발렌티노에게 성공의 시작이었다.
로마에 왔던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발렌티노를 찾아왔고,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갔다.
그는 62년 당시 패션 중심지였던 피렌체에서 패션쇼를 열면서 국제 무대에 데뷔한다.
그의 첫번째 쇼는 ‘패션계의 새로운 발견’으로 환영받았고, 30살의 젊은 디자이너는 외국 바이어들로부터 밀려드는 주문과 언론의 정열적인 찬사에 빠져들었다.
67년 발렌티노는 화이트를 변형한 크림색, 초크, 모래빛, 담갈색, 베이지 등 그의 유명한 무채색 작품들을 남녀 모델에게 입히고 발표회를 열었다.
그가 다른 어떤 드레스 메이커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입증한 무대였다.
한 저널리스트는 그의 작품을 '마치 자생하는 귀족적인 창백함과 같다'라고 논평했다.
황흘하고 화려한 색들이 유행하던 당시로서는 발렌티노의 작품들이 독특한 매력으로 느껴졌다.
패션계는 혼란에 휩싸이고, 그의 작품들은 유행의 바람을 주도해나갔다.
발렌티노의 ‘V’ 로고는 전세계에 걸쳐 유명해졌다.
재클린 케네디, 파라 디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같은 여성들이 그의 작품을 입었다.
특히 재클린 케네디는 오나시스와의 결혼 예복으로 발렌티노를 선택했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67년 그는 패션 오스카로 불리는 ‘니먼 마커스’상을 수상했다.
60년대 후반 발렌티노는 사업 파트너인 지안카를로 지아네티를 만났다.
지아네티의 천재적인 사업감각에 힘입어 디자인 하우스는 세계적으로 뻗어가는 성공을 일궈냈다.
브룩 실즈는 80년대 스타일의 전형으로 발렌티노를 입고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다.
86년 발렌티노는 이탈리아 최고의 훈장인 ‘카발리에레 디 그란 크로체’ 수상자로 대통령으로부터 지명됐다.
90년에는 친구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격려에 힘입어 에이즈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한 단체인 ‘L.I.F.E.’를 창설했다.
그의 디자인 철학은 ‘고전미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함’의 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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