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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재벌 기업지배구조는 철옹성
[포커스] 재벌 기업지배구조는 철옹성
  • 권태호(한겨레 경제부)
  • 승인 2001.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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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침체에 몰려 재계에 역공 당해… 투자·수출 관련 요구 대부분 긍정적 검토
최근 규제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진 재계와 정부의 갈등은 ‘울고싶은 데 뺨 때리는 격’으로 진행된 측면이 있다.
최근 재계가 정부에 건의한 출자총액한도 폐지, 30대 기업집단 지정제도 완화, 부채비율 200% 획일적 적용 완화 등은 이전부터 꾸준히 재계가 주장해온 것으로 별반 새로울 게 없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자유기업원 민병균 원장이 지난 5월2일 각계에 보낸 e메일을 통해 “정부가 참여연대, 민노총 등과 합세해 한국 사회를 국정파탄으로 몰아가고 있다”며 정책 좌경화에 대항하는 국민궐기를 주장하면서부터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민 원장의 주장에 오히려 부담을 느껴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이 5월7일 각각 기자간담회를 열어 정부의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강도높게 비판하면서 문제가 본격화됐다.
이런 와중에 언론이 정부와 재계의 입장을 연일 전하면서 전선이 점점 확대되는 양상을 띠었다.
재계가 이처럼 정부정책에 봇물 터지듯 거센 주장을 하는 배경에는 경기부진과 레임덕 현상이 지목되기도 한다.
경기가 장기 침체 움직임을 보이면서 정부가 재계 주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렸고, 정권 초기 경제위기 주범으로 몰려 잔뜩 몸을 낮췄던 재계가 정부의 이런 약점을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재계는 모두 ‘갈등 양상’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재벌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사안이 아니라면 재계의 주장을 적극 받아들일 자세를 보이고 있다.
재계는 재계대로 ‘폐지’ 일변도 주장에서 ‘완화 또는 축소’ 등으로 한걸음 물러서 ‘실리’를 찾으려하고 있다.
재계의 요구사항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기업정책을 경제력 집중 억제 차원에서 벗어나 글로벌 기준에 맞춰달라는 것이다.
좌 원장은 “정부가 기업이 전략적으로 결정해야 할 내부 통제·재무·사업구조 등에 대해서까지 개입해 시장경제 원칙에 배치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재계는 내년 3월까지 초과분을 해소해야 하는 출자총액제한 제도, 30대 기업집단 지정제도, 부채비율 200%, 동일인 여신한도 제한 등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재계는 특히 내년 3월까지 처분해야 할 출자한도 초과분이 13조6천억원이라며, 이렇게 될 경우 주가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경련은 이에 따라 30대그룹의 출자한도 초과분 해소시한을 일정 기간(3년) 유예하고, 구조조정을 위한 출자와 핵심역량 강화를 위한 신규 투자도 출자한도 제한에서 제외하는 등 출자총액제한 제도와 세제 개선을 통해 기업의 투자여건을 강화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기존 기업지배 구조는 여전히 철옹성 정부는 재벌정책의 양대 축인 출자총액제한 제도와 30대 기업집단 지정제도의 골격은 유지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경쟁력 강화와 관련한 재계 요구에 대해서는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며 출자총액제한의 예외인정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나섰다.
정부는 또 수출입 관련 신용한도를 동일인 신용공여한도 관리대상에서 제외하고, 해외 현지법인에 대한 본사의 지급보증한도 증액, 부채비율 200% 적용대상 제외업종 확대 등 투자·수출과 관련된 재계 요구사항에 대해 긍정적 검토를 하고 있다.
결국 결론은 기업지배구조 문제로 귀결된다.
재계의 규제철폐 주장에 대해 김기원 방송대 교수(참여연대 실행위원)는 “정부가 재벌개혁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라며 “황제경영과 선단식 경영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재벌체제가 책임경영 체제로 바뀌면 30대 기업집단 지정이나 출자총액 제한 등이 원인무효가 돼 지금같은 논란을 빚을 필요도 없다”고 일축했다.
즉 소유·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수술요법을 쓰지 않고 정부가 대증요법에만 의지한 결과, 결국 재벌개혁도 경제활성화도 이루지 못한 채 재계의 역공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도 “주주들이 경영진의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이사회의 잘못된 투자결정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집단소송제와 집중투표제가 제대로 도입된다면 굳이 인위적인 30대그룹 지정이나 출자총액제한 제도 등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재계는 30대 기업집단 지정제도나 출자총액제한 제도 등에서는 정부에 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본질’에서는 여전히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다.
현재 총수의 전횡을 견제하는 장치는 주식시장이 거의 유일하다.
현재 그룹 전체에 대한 지배주주와 가족의 지분율은 평균 7%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은 그룹 지배권을 거의 100% 독점하고 있다.
견제없는 일방통행식 의사결정은 한보, 삼미, 진로, 대농, 기아, 뉴코아, 한라, 청구 등의 부도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삼성 계열사들이 이재용씨의 e삼성 주식을 인수해 총수 가족의 경영부실 부담을 떠안은 것도 현행 지배구조 체제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삼성SDI는 e삼성 주식 인수 이후 주가하락으로 일주일 사이 주가손실액이 5천억원에 이르렀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재벌체제에 대해 “고도성장기에 신속한 의사결정, 장기투자전략 수립, 내부거래를 통한 사업간 시너지 창출, 유망업종 집중투자 등을 통해 기업발전을 견인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재계에서도 지금 같은 열린 경쟁의 시대에는 이런 ‘지배주주 자본주의’가 더는 빛을 발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구조는 총수의 지위변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어 재계 요구처럼 자율에 기대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재계는 기업규제 철폐에 대해선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장하면서도 지배구조에 관련된 사항에선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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