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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인터넷 내용등급제
[초점] 인터넷 내용등급제
  • 김호준 기자
  • 승인 2001.12.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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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이라는 이름의 내용등급제,정통부,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으로 논란 재현… 시민단체 '법적 강제력 있다' 반발 인터넷 내용등급제를 놓고 정보통신부와 시민, 사회단체의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정보통신부는 ‘개인정보보호 및 건전한 정보 통신질서확립 등에 관한 법률’(약칭 통신질서확립법)을 통해 인터넷 내용등급제를 도입하려다 실패했다.
인터넷 사이트를 영화나 TV 콘텐츠처럼 일률적인 등급으로 나누려던 정통부의 의도는 시민·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입법부에서도 지지를 못 받았기 때문이다.
정통부가 제출한 법안은 청소년 유해매체물에 대한 표시의무만을 규정한 ‘정보통신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로 바뀌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과정에서 정통부가 법 시행령에 청소년 유해매체물에 ‘전자적 표시’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면서 논란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일단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이하 윤리위)가 청소년 유해매체를 지정한다는 점, 그리고 매체가 의무적으로 표기해야 하는 전자 표시란 인터넷 내용등급제에서 시도하려 했던 ‘내용등급 표시’와 같은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윤리위는 이 시행령에 따라 올해 11월부터 약 530개 사이트를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하고, 그 사이트에 ‘픽스’(PISC)라는 기술표준에 의한 전자적 표시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윤리위 홈페이지에서 이 전자적 표시를 읽어내 ‘청소년 유해사이트’를 걸려내는 차단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사용하라고 권장했다.
이 조치에 대해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된 일부 사이트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성애 사이트인 엑스존은 ‘청소년 유해매체 표시를 하지 않을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를 받고 사이트를 폐쇄했다.
청소년 유해매체 표시를 하느니 폐쇄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진보네트워크, 새사회연대 등 시민, 사회단체에서는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이 실질적인 내용등급제의 시작이라고 반발하며 명동성당과 정보통신부 앞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윤리위는 이와 별도로 9월23일부터 ‘내용등급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정보제공자들이 노출, 성행위, 폭력, 언어 등을 고려하여 0~4등급까지 자율적으로 등급을 매기도록 하는 ‘자율적인’ 내용등급제를 실시하고 있다.
실제 매주 100개 이상 사이트가 윤리위 홈페이지에 자신이 매긴 등급을 등록한다.
윤리위는 이 서비스를 위해 등급을 인식해서 적절한 등급의 콘텐츠만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내용 선별 소프트웨어’를 보급할 계획이다.
윤리위는 이 소프트웨어 개발을 완료하고 민간업체에 기술을 이전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윤리위가 하는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이 ‘자율적인’ 내용등급제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인터넷 규제, 사회적 합의 도출해야 진보네트워크 장여경 정책실장은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과 인터넷 내용등급제는 동일선상에 있다고 주장한다.
'청소년 유해매체를 걸러내는 데 쓰이는 차단 프로그램과 윤리위가 보급하려는 내용선별 소프트웨어는 PICS라는 같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 유해매체를 지정하는 기관인 윤리위가 자율적 내용등급 서비스까지 함께 하고 있다.
정부의 청소년보호 의무에 따라 피시방, 학교, 도서관 등 공공기관에 청소년 유해매체 차단프로그램이 깔리면 사실상 내용등급제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 그러나 정통부는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과 내용등급제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못박는다.
정보이용과 라봉하 과장은 청소년 유해매체는 청소년보호법상 유해매체 심의기준에 따라 지정되고 있을 뿐이라고 밝힌다.
'차라리 청소년보호법을 문제 삼는다면 이해가 가지만, 윤리위가 청소년 유해매체를 지정했다는 이유로 정부가 강제적인 내용등급제를 강행하고 있다는 시민단체의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 윤리위 내용등급팀 박종현 팀장도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과 자율적인 내용등급서비스는 별개라고 주장한다.
'미국, 일본 등에서 쓰이는 등급기준을 참고해 윤리위 등급기준을 만들었다.
하지만 인터넷 정보제공자가 등급을 매기도록 강제하고 있지는 않다.
그야말로 자율적이다.
정보제공업체에서 허위로 등급을 매겨도 윤리위는 이를 통제할 수단이 없다.
' 박종현 팀장은 내용선별 소프트웨어 역시 윤리위가 개발은 했지만 배포는 민간업체에 맡기기 때문에 강제력이 없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시민·사회단체에서는 등급제가 자율적으로 시행된다는 데 의문을 제기한다.
사전 등급표시는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윤리위가 사후 점검을 통해 윤리위 등급기준에 맞지 않는 사이트에는 시정권고를 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김인규 교사 홈페이지, 아이노스쿨 사이트 폐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윤리위는 국내 인터넷 사이트들을 모니터링하며 자체 심의규정에 따라 인터넷 정보제공자에서 시정 권고를 해왔다.
권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정통부 장관에게 건의하면 사이트를 폐쇄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법적 강제력이 있는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과 자율적이라고 보기 힘든 내용등급 서비스를 국가기관과 마찬가지인 윤리위가 하는 것은 타율 규제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결법무법인 이상희 변호사도 윤리위가 민간 자율기구 형식을 띠고 있지만 실제는 국가기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헌법재판소 ‘공연윤리위원회 사전심의 위헌법률 심판사건’에서 독립적인 위원회라도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검열을 행할 경우 행정기관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윤리위도 공연윤리위원회와 비슷한 조직구성 방식을 가지고 있고 형벌 대상이 되는 행위를 결정하고 있기 때문에 행정기관으로 보아야 한다.
' 사이버연구소 민경배 소장은 정부가 일률적인 잣대로 인터넷을 규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어느 부모든 아이들이 음란물, 폭력물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인터넷에 대한 일정한 규제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TV처럼 정부기구가 나서서 등급기준을 세우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
인터넷을 통한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막을 위험이 있다.
' 전문가들은 정부가 ‘자율적’ 인터넷 내용등급제를 시행하기에 앞서 인터넷 규제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상희 변호사는 미국에서는 민간사업자들이 NGO들과 협의해 자체 규제기준을 마련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윤리위를 진정한 민간기구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현재는 윤리위가 권고하면 민간사업자는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윤리위와 시민, 사회단체간 의사소통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민간위원회’를 중심으로 인터넷 사업자와 시민, 사회단체가 함께 인터넷 규제 기준에 대해 협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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