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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은밀하게, 더 은밀하게!
[문화] 은밀하게, 더 은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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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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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까지 말썽이군. 정말 짜증난다.
빨랑 늙어서 죽어버려야지. 휴학할 용기두 없는 한심한 인간. 그냥 사람들 안 보면 그만인데. 떠나고 싶어 안달이면서. 그만큼 정이 들어서 그들을 배신하는 게 겁이 나는 건가? 젠장젠장!! 사는 게 짜증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날좀 죽여줘!!!!”(다음카페 ‘성대국문익명게시판’에서 퍼옴)

“우연히 알았습니다.
아주, 아주, 우연히. 학교에서 친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제 친구에게도 드디어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됐어염. 그 아이가 누굴까? 같은 반 아이라고 하더군여. 근데, 그런데, 그 아인 제가 몇년 전에 마니마니(많이많이) 조아하던 아이였어여.”(다음카페 ‘익명세상’에서 퍼옴)자신을 가린 채 속을 털어놓는다 ‘익명성’의 세계는 안락하다.
소파에 혼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 TV를 보는 것만큼이나 편안하다.
내가 고함을 지르든 욕을 하든, 아니면 신세한탄을 하든 뭐라고 간섭할 사람이 없다.
날카로운 감시나 상대방의 반응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익명성은 현실에 발담그고 있으면서도 현실과 담을 쌓을 수 있는 편리한 도구다.
최근 들어 네티즌들이 “익명 속으로” 좀더 깊숙이 잠수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오로지 익명만을 주제로 한 동호회나 커뮤니티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커뮤니티 사이트인 다음 daum.net에는 ‘익명세상’, ‘성대익명게시판’, ‘익명의 섬’ 등 올해 들어 10여개 남짓의 익명 카페(동호회)가 만들어졌다.
카페들은 “자신을 가린 채 속을 털어놓으세여”, “익명게시판만 존재하는 나라!”, “익명의 멜친구가 하나는 있어야죠” 따위의 문구를 내걸고 회원들을 모집하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익명을 상품화한 서비스도 나타나고 있다.
굳세이닷컴 www.goodsay.com은 8월 중순부터 상사나 애인에게 “말 못할 사연을 전달해준다”며 ‘익명 메일’을 제공하고 있다.
사이트에 들어가 회원등록을 한 뒤 이메일을 보내면 발송자의 메일 주소가 ‘I have@goodsay.com’으로 바뀌어 전달된다.
드림위즈 www.dreamwiz.com에서도 9월부터 익명 쪽지로 사랑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랑의 찜’ 서비스를 시작했다.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인터넷의 출발 자체가 익명성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에 들어갈 때는 육체라는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벗어던진다.
외모나 생김새, 주민등록증 대신 오로지 아이디나 아바타(그래픽으로 만들어진 분신)를 통해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현실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사이버공간에서 새로운 에너지들이 표출될 수 있었던 것도 인터넷의 익명성 덕택이다.
익명성이 설 자리 점점 사라져 하지만 인터넷이 점점 ‘광장화’되면서 익명의 영역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회학자 홍성태(35)씨는 인터넷이 비즈니스적으로 활용되면서 사용자에게 점차 실명화된 정보들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신용카드를 이용해야 하는 인터넷 쇼핑몰, 실명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친구들을 만날 수 없는 동창회 사이트 등 익명성이 ‘안타깝게도’ 주류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네티즌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익명 세계를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
익명 동호회들이 등장하고 있는 데는 이런 경제적·문화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대개의 커뮤니티들이 한두개쯤 익명 게시판을 걸어놓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커뮤니티는 컴퓨터, 친목 모임 등 공통의 관심사나 지역·혈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아이디나 닉네임을 사용해도 어휘나 어투, 고백 내용 따위를 보면 게시판에 글을 올린 게 누구인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익명세상 ‘주인장’ 스칼렛(20·가명)은 “닉네임이나 아이디조차 게시판에 올리지 않고 철저하게 익명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네티즌들이 일반 커뮤니티의 익명 게시판 대신 굳이 익명 동호회를 찾는 것도 좀더 완벽한 익명성을 보장받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줍짢은 익명성은 오히려 다툼을 부추길 수도 있다.
스칼렛은 “상대방을 밝혀내기 위해 싸움이 붙는 바람에 커뮤니티가 폐쇄된 곳도 상당히 많다”고 말한다.
스칼렛이 가입한 동호회도 세군데서나 이런 일이 벌어졌다.
예컨대 누군가 “너무 힘들다”라는 글을 게시판에 올렸놓았다고 치자. 글을 본 다른 사람이 “그걸 갖고 뭐 힘들어 하냐”라는 딴지를 걸면 감정 싸움이 붙는다.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답장을 쓴 사람이 누구일까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칼렛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원하지만, 현실 세계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은 원치 않는 네티즌들의 욕구를 익명 동호회가 충족시켜준다”고 분석한다.
굳세이닷컴이나 ‘사랑의 찜’을 이용하는 것도 익명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심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익명 게시판에 올리는 사랑 고백, 상사에 대한 욕설이나 건의 따위처럼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정체는 숨기고 싶은 이중심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특정인을 상대로 한 익명성이라는 것뿐이다.
때문에 더욱더 철저한 익명성 보장을 필요로 한다.
굳세이닷컴은 송신자의 이메일을 암호화하는 방법으로, 사랑의 찜은 드림위즈 서버를 ‘중매자’로 해서 사용자의 익명성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이 또한 인터넷에서 익명성의 영역이 줄어들면서 은닉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익명성이 가진 순기능과 역기능 물론 익명성의 폐해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어느날 일방적으로 “당신을 좋아합니다”라는 메일을 받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다.
발신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무 의미도 없는 장난 이메일을 매일 한두차례씩 받다보면 신경이 곤두선다.
심지어 욕설과 근거없는 소문으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치고 법정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렇다고 인터넷의 익명성이 갖는 ‘장점’을 깡그리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악용되면 현실범죄 못지않은 파괴성을 갖고 있지만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익명성은 문제가 될 게 없다는 것이다.
굳세이닷컴 박희정(41) 사장도 “의사소통이 막힐 경우 사회가 받는 스트레스는 가중된다”며 익명성의 순기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사이버문화연구실 최정은정 선임연구원은 “익명성은 양날을 가진 검”이라며 네티즌 스스로의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치 가면무도회처럼, 인터넷의 익명성은 불륜의 장이 될 수도 있고, 청혼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익명성은 양면성을 가진 사회의 필요악”
익명세상 카페를 운영하는 스칼렛(20)씨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현재 대학 2학년에 재학중이라는 그는 본명을 물어보자 “익명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장’으로서 실명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익명세상은 회원수가 87명으로 가장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 익명 동호회 가운데 하나다.
익명 카페를 만든 시기와 동기는. 올해 5월12일 만들었다.
답답하고 힘들어 만든 것이긴 하지만, 정확히 왜 만들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개인 카페로 만들려고 생각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고민을 털어놓고 싶어한다.
그래서 동호회 형식이 됐다.
익명 카페에 대한 회원들의 반응은. 특별한 반응은 없는 것 같다.
가끔 힘든 일을 털어놓으면서 이 게시판이 있어 다행이라며 감사한다는 글이 올라오기는 한다.
사실 이곳 회원들간에는 교류가 없다.
가끔 누가 쓴 글에 위로나 조언의 답변들을 달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글에 답변이 없다.
아무래도 자기 힘든 일을 털어놓는 게 목적이다.
다소 이기적인 면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른 익명 카페들에 비해 활발히 운영되는 것 같다.
익명세상은 글쓴이 자체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닉네임조차 알 수 없다.
초기에는 완전한 익명 카페가 이곳뿐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고 아류 카페들이 많아진 지금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많은 곳에 믿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의 심리로 몰리는 것 같다.
익명성의 긍정적인 측면을 꼽는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불만을 해소함으로써 일상생활에 좀더 즐겁게 임할 수 있는 면죄부 공간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뻔히 잘못된 일임에도 대항할 수 없어 참아야 하는 상황들도 있다.
이럴 경우 해결은 할 수 없지만 익명성을 이용해 나름대로 화풀이가 가능하다고 본다.
스트레스 해소나 감정의 배출구가 없다면 억눌린 감정이 폭발해 몇곱절로 큰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익명성의 역효과를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개인의 스트레스 해소 차원을 넘어 남을 이유없이 모략하는 공간으로써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익명사회 안에서, 또는 외부에서 제재가 들어간다.
즉 자연에서의 자정작용과 같은 일들이 저절로 일어난다.
쓸모없고 독을 지닌 곰팡이에서 중요한 약의 원료가 나오듯이, 익명은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되는 필요악이다.
익명성의 건강함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네티켓이 있다면. 네티즌에게 문제되는 것은 한가지 소문이 퍼지면 사실 확인 여부를 떠나 일단 퍼뜨리고 보는 경향이 있다.
개개인들이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함부로 흥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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