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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공허한 메아리, 기업대출 독려
[비즈니스] 공허한 메아리, 기업대출 독려
  • 조준상/<한겨레> 경제부 기
  • 승인 2001.12.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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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 신용도 낮은 기업 여전히 꺼려… 정부 국면전환용 카드인 듯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지난 12월6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 시중은행장들을 모아놓고 기업대출 확대를 독려했다.
진 부총리는 “올해 1년 동안 실시한 회사채 신속인수제도가 끝나게 돼 연말연시 은행들의 기업금융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며 “건전성과 수익성을 유지하면서 기업들이 원활한 자금조달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정부가 최근 은행권에 기업대출을 독려하고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지난 11월29일 감사원의 공적자금 특별감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 7조원을 웃도는 재산을 신고하지 않고 은닉한 공적자금 투입 금융기관과 부실기업 기업주들을 상대로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것으로 알려지자 은행권의 ‘몸사리기’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국제기준 적용이 근본적 문제 하지만 정부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수두룩하다.
IMF 사태 이후 은행들이 기업대출을 꺼린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대신 가계대출, 특히 리스크가 매우 적은 주택담보대출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은행권의 모습은 근본적으론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10% 이상 등 정부가 금융기관에 적용해온 ‘글로벌 스탠더드’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게 은행권의 시각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기업대출은 위험가중치가 100%인 위험자산으로 분류돼 기업에 100원을 꿔주면 100원의 자본금을 적립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들의 경우 기업대출을 했다 혹시 잘못되면 부실채권이 늘어나 정부와 맺은 경영계획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게 된다.
이러다 보니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에게 대출을 해주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난 11월 중 회사채 발행동향을 보면, 법정관리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기업,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 따른 채무재조정 기업을 뺀 일반기업의 회사채 순발행액은 -1조7066억원을 기록했다.
지난 9월 이후 3개월째 순상환이 계속됐으나, 순상환 규모는 전달의 2조3433억원보다 크게 줄었다.
특히 A등급 이상 우량기업의 순상환액이 1조2천억원으로 순상환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BBB+과 BBB0등급 순상환액은 2200억원 뿐이었다.
한국은행과 증권업계 등에 따르면, 이 기업들이 회사채 순상환을 기록한 것은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지난 8월까지 채권금리 하락세를 이용해 회사채를 대규모로 미리 발행해 조달한 자금으로 회사채 만기도래분을 갚은 데 따른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경기침체기라 이 기업들의 자금수요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수출이 본격적인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해야 기업들의 투자심리가 회복되고 자금 수요도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도 자금 사정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는 점도 정부의 기업대출 독려와는 어긋난다.
지난 11월부터 재개된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CBO) 발행 등을 통해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은 회사채 6천억원 가량을 발행했다.
최하위 투자적격등급인 BBB- 등급 이하 회사채의 순상환액이 지난 10월 7300여억원에서 2800여억원으로 감소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업의 긴급자금 수요를 나타내는 지표인 시중은행 당좌대출한도 소진율이 지난 11월 13.3%로 10월 13.6%보다 오히려 낮아진 것도 기업의 전반적인 자금사정에 여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정부의 ‘기업대출’ 독려는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기 쉽다.
결국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에게도 은행들이 과감히 대출에 나서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이미 BBB0 등급 이상의 기업들은 자금 사정에 여유가 있고, 심지어 은행마다 서로 앞다투어 싼 금리에 자금을 쓰라고 하는 바람에 문어발 확장의 유혹까지 받는다는 게 은행권 관계자들의 귀뜀이다.
현실 무시한 정부입김 실효성 의문 정부의 기업대출 독려에 ‘자발적’으로 호응하는 듯한 일부 은행들의 기업대출 확대가 과연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에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민은행은 내년 1월 초부터 5조원 이상, 조흥은행과 한빛은행은 연말까지 각각 2조원, 1조원씩 기업대출을 늘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기업대출 확대분은 신용도가 BBB0 이상인 기존 거래기업에 대한 여신이 대부분이다.
조흥은행 관계자는 “신규 기업이나 신용도가 낮은 기업에 대출을 해주기는 어렵다”고 털어놨다.
이 은행들의 기업대출 확대분이 기존 거래기업의 대환(이전에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로 빌렸던 자금을 갚기 위해 싼 금리로 대출받는 것)용 수요로 충당될 것이라는 게 은행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런 현실은 정부의 기업대출 독려에 대해 “경기침체를 반영해 기업의 자금 수요가 적은 데다,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에겐 현실적으로 대출하기 어렵다.
정부의 뜻이 이런 기업들에까지 신규 대출에 나서라는 것이냐”는 시중은행 관계자들의 항변에서 묻어난다.
성공회대 경제학과 유철규 교수는 “기업대출을 늘려야 한다는 정부의 당위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동안 글로벌 스탠더드에 바탕한 정부의 금융구조조정 과정에서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에게 은행들이 자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인식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는 자신의 정책이 낳은 부작용을 ‘구두 개입’을 통해 보완하려고 하지만 통용되지 않고 자꾸 쓸데없는 말만 많아진다는 얘기다.
유 교수는 “정부의 기업대출 독려가 실효성이 있으려면 어떤 기업과 산업에 지원해야 하는지 근거와 정당성을 부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중간재·자본재 국산화율이 자꾸 떨어지고 있는데, 이 부문의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은 국민경제 차원에서 부가가치 창출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니 신용도가 낮더라도 과감한 위험 감수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정부가 은행권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만약 이렇게 지원된 기업대출이 문제가 되더라도 정부가 은행과 공동책임을 지겠다는 일종의 합의를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얘기다.
설사 은행권이 필수적이고 중요하지만 신용도가 낮아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기업에 대출을 한다고 해도, 신용도가 낮다는 이유로 높은 금리를 물리면, 자금 사정이 어려운 기업에 높은 금리를 물리는 역설적인 결과가 빚어지게 된다.
이런 지금의 딜레마를 풀려면 정부의 진지한 의지를 발휘하는 것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런 딜레마를 은행권의 리스크 관리능력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식으로 내치면서 기업대출 독려라는 총론만을 외치는 한 ‘전시효과’라는 지적을 면하기는 어렵다.
지난 11월29일 감사원의 공적자금 특별감사 결과 발표 이후 정부의 기업대출 독려 행위에 대한 은행권의 대체적 분위기는 “공적자금 정국에서 빚어지고 있는 정부에 대한 비판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 위한 ‘국면전환용’ 카드”라는 것이다.
정부의 태도로 보아 은행권의 이런 인식은 그리 틀린 분석도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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