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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손 특수’는 없다
[일본] ‘황손 특수’는 없다
  • 함석진/ <한겨레> 국제부
  • 승인 2001.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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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되는 경제지표에 축하 열기 무색… 경제성장률 2분기 연속 뒷걸음질 12월초 일본 열도가 마사코(37) 왕세자비의 출산으로 온통 축하 분위기에 휩싸였을 때, 정부 관료나 기업 경영자들은 왕세자비 출산의 경제효과를 따지고 있었다.
경제연구소들은 왕세자비의 출산이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결혼을 서두르게 하고 출산 붐을 일으켜 유아 관련 제품에 대한 수요를 늘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이이치생명 경제연구소의 마쓰무라 게이즈 연구원은 왕실의 출산이 일본 경제에 3455억엔의 직접적인 신규 수요창출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고, 노무라연구소는 소비자심리 개선효과를 감안하면 국내총생산(GDP)이 0.2%포인트 정도 늘어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왕세자 출산을 축하하는 뜻에서 손자와 손녀들에게 선물을 사주느라 주머니에서 약 14조엔을 꺼내 쓸 것이란 예상도 나왔다.
일본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편성한 올해 회계연도 추가경정 예산 규모가 3조엔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다.
왕세자비 출산 계기 소비심리 회복 ‘기대’ 그러나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일본이 이처럼 왕세자비의 출산에서 경제회복의 실마리라도 찾아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일본 경제가 지금 얼마나 심각한 지경인지를 반증해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현재 일본 경제는 대체 얼마나 심한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일까? 경제지표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구석이 없다.
최근 일본은행은 12월 중 대형 제조업체들의 단기경기전망(단칸)지수가 마이너스 38로 3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일본은행은 '경제가 아직 바닥에 도달하지 않았다'며 '앞으로 경기가 더 나빠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 재무성이 발표한 4분기 기업경기실사지수(BSI)도 마이너스 39.3으로 지난 1983년 조사 시작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10월 기계 주문액은 전달보다 4.2% 감소할 것이라는 애초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무려 10.1%가 줄었다.
같은달 실업률도 5.3%로 전달의 사상 최고치를 유지했다.
광공업 생산은 13년7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올 3분기 제조업 경상이익은 지난해보다 53.4%가 감소해 26년 만에 최악의 상태를 나타냈다.
기업의 실적 부진은 곧바로 소비 감소로 이어져 일본의 소비지출은 98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에도 3월을 빼고 계속 마이너스 행진이다.
지난달 27일 경제통산성은 10월 중 소비매출액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4.9%가 감소해 99년 1월 이후 최대 감소폭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백화점들은 38개월째 매출감소에 허덕이고 있다.
전분기 대비 경제성장률은 2분기 마이너스 1.2%에 이어 3분기에도 마이너스 0.5%를 기록해 두달 연속 마이너스 수치를 보였다.
경제의 약세를 반영해 달러당 엔화 가치는 연초보다 12엔 가량 떨어진 125~126엔 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엔화 가치가 회복될 가능성은 많지 않으며 내년 상반기에 130엔, 하반기에 135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무역적자란 말을 들어보지 못했던 일본인들이지만, 요즘엔 수출 걱정을 많이 한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지난 4~6월 분기에 무역적자를 기록했던 일본은 올해 10월 흑자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 늘긴 했지만 앞으로 무역수지 흑자폭이 점점 줄어 2005년에 최초로 무역적자를 낼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지난 3일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Aa2에서 포르투갈이나 슬로베니아보다 낮은 Aa1으로 낮춘 무디스는 일본 정부의 개혁조처가 미흡할 경우 18개월 안에 다시 A로 등급을 낮출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무디스는 등급을 낮춘 이유로 '현 일본 정부의 경제정책이나 새로운 개혁 프로그램은 모두 정부 부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가 부실채권을 해결할 능력도 의사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일본 경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잘 알려진 것처럼 금융권의 부실채권이다.
올 3월말 현재 은행들이 안고 있는 부실채권 총액은 31조8천억엔이다.
그러나 기업 경영악화에 따른 ‘요주의 채권’을 포함할 경우 100조~150조엔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0년 동안 경험했던 것처럼 매년 요주의 채권 중 5~10%가 부실해지는 것을 감안하면 전체 부실채권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게 뻔하다.
90년대 초 이후 일본 은행들은 68조엔을 부실채권 처리에 쏟아부었으나 부실채권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고 있다.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부실채권을 해결하기 위해 은행이 돈줄을 끊으면 기업이 무너지고 이는 곧 실업문제와 은행 부실,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이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이다.
10여년간의 장기 침체를 겪으면서 물가는 계속 떨어지고 있으나 소비는 늘기는커녕 더욱 위축되고 있다.
일본 국내총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소비가 맥을 못추니 경기회복은 기대하기 힘들다.
물가하락은 경기침체에 고전하는 기업들이 상품 가격을 앞다퉈 떨어뜨리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기업의 수입이 줄어드니 실업자는 늘어나고 다시 수요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11년 동안 계속된 경기침체와 땅값 하락으로 새로 부실이 발생하는 속도가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속도를 크게 앞지르고 있다.
은행들이 부실확대를 막기 위해 보유한 유가증권을 서둘러 매각하다 보니 경기침체, 주가·땅값 하락을 더욱 부추기는 꼴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진 원인을 적자생존이라는 시장원리를 무시한 정부와 금융기관의 태도에서 찾는다.
그 이면에는 일본 정부의 간섭·보호정책과 금융기관 도덕적 해이가 놓여 있다.
부실기업을 과감하게 정리함으로써 시장원리를 작동시키는 것이 일본 경제회생을 위한 최우선 과제이지만, 개혁을 내세운 고이즈미 정권의 칼날은 무디기만 하다.
리처드 카츠 <오리엔탈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은 '일본이 안고 있는 문제가 워낙 심각하기 때문에 지금 개혁을 제대로 하더라도 문제 해결에는 최소한 5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경제의 덫>의 저자 고바야시 게이치로는 ‘거품 붕괴와 잃어버린 10년’으로 시작한 책에서 일본인들에게 앞으로 또다른 10년까지 잃어버릴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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