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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책읽기]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휴머니스트
[이권우의책읽기]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휴머니스트
  • 이권우 / 도서평론가
  • 승인 2001.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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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 동양철학자가 서양철학자에게 바나나를 예로 들어 그의 정체성에 의문을 던졌다.
피부는 노랗지만 속은 ‘백색’ 사고로 가득찬 사람이 아니냐는 뜻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비유다.
허를 찔렸을 법한 서양철학자는 자신의 처지를 마귀역을 맡은 배우에 비유했다.
서양철학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있지만, 자신은 분명 한국적 문제상황에서 철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자는 근대성의 폐해를 지적하며, 그 씨앗이 서양철학에 내재해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태양을 가려야 한다는 한 철학자의 말을 인용했다.
태양이 내뿜는 강렬한 빛 때문에 수많은 별들이 쏟아내는 아름다운 빛을 볼 수 없는 탓이다.
탈근대의 가능성을 동양철학에서 찾는 당위성을 강조한 것이다.
급소를 맞았을 법한 서양철학자는 근대화의 폐해를 지적하는 만큼 그것의 이익도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우리는 오히려 서양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반격이다.
동양은 억압받아왔다고 비명을 지르고, 서양은 왜곡되어왔다고 변명한다.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휴머니스트 펴냄)는 동양철학자와 서양철학자의 ‘지적 충돌’을 생생하게 기록한 대담집이다.
동양철학자는 신이 없어도 우주와 자연을 설명하는 동양철학에 매료돼 이 분야를 평생의 업으로 택했다.
대학에서 이탈리아어를 전공한 서양철학자는 우연한 기회에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에 유학을 가면서 본격적으로 서양철학의 세례를 받았다.
이 짧은 이력만으로도 두사람의 만남이 ‘불협화음’을 빚어내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책 한권 분량으로 묶일 만큼 여러 차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예상한 대로 불협화음은 계속되었다.
오해와 편견, 그리고 독단이 해소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불편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불협화음이 읽는이로 하여금 많은 것을 성찰하게 만든다.
그 첫째는 당연히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에 대한 반성이다.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으로서 철학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서양철학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은 그 두번째다.
불협화음도 음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얼핏 느끼게 된다.
결국 이 책이 불협화음으로 끝맺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말을 섞다 보면, 몸을 섞으면 그렇듯이, 오해도 편견도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에 이르게 되는 법이다.
두 철학자는 앞으로 “공통된 이해를 기반으로 더 나은 문명과 철학, 그리고 미래를 이루기 위해 합심·협력”하기로 했다.
이 결론을 내 식으로 바꾸면 ‘등소평적 철학’이라 명명할 수 있다.
검은 철학이든 흰 철학이든, 아니면 둘이 섞인 회색 철학이든, 우리 현실을 진단하고 그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아, 참! 예상된 불협화음을 ‘협화음’으로 바꾸기 위해 애쓴 동양철학자는 이승환 고려대 교수, 서양철학자는 김용석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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