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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새 화폐 ‘아르헨티노’를 믿어다오
[아르헨티나] 새 화폐 ‘아르헨티노’를 믿어다오
  • 이용인 기자
  • 승인 2002.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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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사아 대통령, 제3 통화 발행 승부수… 모라토리엄 선언 등 긴급조치도 한반도의 14배나 되는 광활한 대지와 풍부한 자원 등으로 아르헨티나는 ‘행복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나라다.
20세기에는 라틴권 유럽인들이 꿈꾸는 이민 선호 1순위 국가였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중남미의 파리’로 불릴 만큼 화려했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경제부흥을 이뤄 ‘남미의 모범생’으로 통했다.
그런 아르헨티나가 ‘패가망신’해 국제적으로 망신살을 뻗치고 있다.
경제혼란에 따른 노동자들의 시위로 페르난도 드 라 루아 대통령이 사임했고, 아르헨티나 의회는 산후안 주지사인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54)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한다.
사아 대통령은 취임 3일 만인 지난 12월23일 1320억달러에 이르는 공공부채의 상환유예를 선언했다.
공식적으로 ‘모라토리엄’(지급 유예)을 선언한 것이다.
사아 대통령의 선언은 대외적으로는 ‘모라토리엄’이지만 사실상 ‘디폴트’(채무불이행)에 가깝다는 평가다.
모라토리엄이 외채의 상환기한을 일시적으로 연기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데 비해, 디폴트는 이자와 원금의 상환이 불가능해진 상태를 말한다.
물론 사아 대통령은 '외채를 갚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기는 했다.
문제는 채무 지불유예가 언제까지인지를 확실하게 밝히지 않았고, 채권국과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에 디폴트에 가까운 것이다.
어찌됐든 모라토리엄 선언 다음날인 12월24일 사아 임시대통령은 경제자구책들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핵심은 2002년 1월에 ‘아르헨티노’라는 이름의 ‘제3의 화폐’를 발행하겠다는 것이다.
사아 대통령은 100억달러 규모의 아르헨티노를 발행해 이 돈으로 공무원들의 월급을 주고 비품 등을 구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아 대통령은 전문가들이 아르헨티나 경제 회생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 달러화에 고정돼 있는 페소화의 평가절하나 달러통용제 도입은 거부했다.
빚더미에 신음하는 아르헨티나 경제 물론 새 화폐 발행은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
우선 페소화의 평가절하는 80년대 말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던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다.
실제로 폐소화 평가절하가 단행되면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내려가고 달러 부채가 많은 농가와 기업들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기업 도산이 이어지면서 은행들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
올 3월 대선을 앞두고 집권 페론당이 이같은 모험을 감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평가절하와 정반대인 ‘달러화(化) 정책’은 미국 달러를 자국의 법정통화로 지정하는 것이다.
달러화 정책은 환위험을 없앨 수 있지만 통화주권이 미국에 넘어가기 때문에 통화증발을 통한 경기진작은 불가능하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페소화를 찍어내려면 동일한 가치의 달러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달러가 부족한 아르헨티나로서는 이 또한 기대하기 힘들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새 통화 발행이 대안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모습이다.
물론 새 통화 발행으로 신용경색을 겪고 있는 금융시스템에 자금을 투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페그제도 유지하면서 페소화도 어느 정도 절하하는 용도로 새 화폐를 쓸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가 새 화폐를 보증한다 해도 이미 신뢰를 잃은 터라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새 화폐를 통용하겠느냐는 것이다.
쿠바 등 이미 ‘한 국가, 다(多) 화폐’ 체제를 도입한 나라들도 대부분 실패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게다가 아르헨티나는 새 통화와 달러화의 태환을 금지하고 있어 지구촌 사상 초유의 ‘실험’을 하고 있다는 혹평을 받고 있다.
때문에 새 통화 발행은 공식적으로 정치적 부담이 큰 페소화 평가절하를 발표하기에 앞서 시간을 벌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 집권당 내부에서도 새 화폐 발행에 대해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은 '새로운 통화 도입 계획은 부당하다'며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지난 99년까지 10여년 동안 아르헨티나를 통치했던 그는 '경제안정을 위해서는 기존의 달러화 공용체제가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메넴 대통령의 입김이 어느 정도 작용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새 통화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선 내부단속부터 먼저 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아 대통령은 ‘아르헨티노’ 발행 외에 1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경제구상을 공개했다.
그는 고용창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면서 10만명의 노동자들을 최소 주 25시간 이상 공원청소, 도로청소 등 공공근로에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사회로부터의 지원 가능성을 열어 놓기 위해 긴축조치도 강행하기로 했다.
예컨대 정부 10개 부처를 내무, 외무, 노동 등 3개 부처로 줄이고 신규채용을 동결하기로 한 것이 그것이다.
아르헨티나가 모라토리엄 선언, 신 화폐 발행 등 극단적인 조처를 내놓게 된 배경에는 피폐한 경제현실이 작용하고 있다.
사아 대통령도 밝히고 있듯이 아르헨티나는 3500만 인구 가운데 1400만명이 빈곤층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 가운데 300만명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라고 한다.
부유층과 빈곤층의 격차는 10년 전 27배에서 지금은 120배로 벌어졌다.
경제난이 심해지면서 내수가 줄어 수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외국인 투자자들도 자본을 철수했다.
이에 따라 실업률이 공식적으로는 18.3%, 잠재실업을 포함하면 35%에 이른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공공부채는 1321억4300만달러나 된다.
이 가운데 IMF와 세계은행(IBRD) 등 다국적 금융기관을 비롯해 외국채권단에 진 대외부채가 793억달러에 이른다.
대외부채만 해도 아르헨티나 총 수출액의 2.78배, 부채에 대한 이자지급액만 해도 전체 수출액의 22.6%를 차지한다.
이 정도면 아르헨티나가 ‘빚더미’에 묻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남미의 모범생’으로 불리던 아르헨티나가 이처럼 ‘남미의 문제아’로 전락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일부에서는 비극의 뿌리를 이른바 ‘페로니즘’에서 찾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페론 전 대통령은 쿠데타를 일으켜 부패를 척결하고, 외국인 소유의 철도와 전화회사들을 국유화하는 한편, ‘분배의 정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를 아르헨티나 위기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간 시각이다.
당시에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이런 ‘분배의 정의’를 감당할 만한 재정적 능력이 있었다.
1930년대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쇠고기 수출에 힘입어 1인당 국민소득이 프랑스에 버금가는 경제대국이었다.
아르헨티나 비극의 결정적 원인을 페소화와 달러화를 1대1로 고정시킨 페그 정책에서 찾는 전문가들도 많다.
80년대 말 카를로스 메넴 정권은 인플레이션이 자그마치 5000%에 이르는 등 극심한 경제혼란기에 라울 알폰신 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았다.
그는 달러 대 페소화 환율을 1대1로 고정시키는 극약처방을 실시했다.
91년 도밍고 카발로 당시 경제장관이 주도한 이 정책은 중앙은행의 외환 및 금 보유고에 맞춰 페소화를 찍어낸다는 것으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달러화 수요를 억제해 국내 경제를 순식간에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뒤 아르헨티나 경제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고정환율제는 세계경제의 변동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예컨대 지난 95년 멕시코 페소화 폭락사태로 빚어진 ‘데킬라 파동’이나 98년 아시아 금융위기, 99년 브라질 레알화의 평가절하 등에서 이것은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미국 달러화에 묶여 있던 페소화의 가치는 경쟁국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졌고 결국 수출상품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수출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수출이 줄어들면서 달러 표시 외채의 상환에 필요한 외화 확보도 어려워졌다.
국제통화기금 처방전도 ‘잘못’ 아르헨티나의 비극에는 이런 내부요인 외에 IMF의 처방전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IMF는 91년 아르헨티나로 하여금 고정환율제를 도입하도록 한 장본인이었지만 아르헨티나의 병이 깊어진 2000년에야 문제를 인식하고 고정환율제를 포기하도록 조언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국내 정치상황으로 볼 때 이미 때가 늦은 조언이었다.
아울러 IMF가 아르헨티나에 지나친 긴축재정을 펴도록 요구한 것이 잘못이라는 비난도 제기되고 있다.
신흥시장 국가 입장에서는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보다 국내경제의 추진력을 되살리는 것이 더 중요한데, IMF가 긴축재정의 기준을 너무 높게 설정했다는 것이다.
또한 IMF는 지난해 12월5일 아르헨티나가 긴축재정 실시 등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2억4천만달러의 추가지원을 거부해 사태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모라토리엄 선언이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클 것 같지는 않다.
모라토리엄의 규모는 엄청나지만, 아르헨티나 위기는 지난 42개월 동안에 걸쳐 오랫동안 진행돼왔기 때문에 이미 예측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신흥시장 대부분의 경제체질이 크게 개선돼 있어 97년처럼 세계 경제위기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브라질 경제는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위기가 남미 주변국으로, 그 다음에는 세계경제 전체로 전염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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