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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증시 호황 속 증권업계의 고민
[비즈니스] 증시 호황 속 증권업계의 고민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2.01.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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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장사는 비가 와야 돈을 벌죠. 증권사들은 증시가 좋아야 돈을 벌고요. 우리도 1, 2년 벌어 3, 4년 먹고 사는 장사 아닙니까.” 한 증권사 직원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증권사들은 증시 호황으로 배 부르고 등 따스운 세월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도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점유율 10% 이상을 차지하는 업체가 없을 정도로 치열한 시장경쟁, 수수료가 낮은 사이버 트레이딩에 고객을 빼앗긴 썰렁한 객장, 불쑥불쑥 들려오는 증권사 인수합병(M&A) 루머, 경영진이 수익구조 다변화를 선언한 지 1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변화가 없는 수익기반…. ‘이 비가 그치면 무얼 먹고 사나’ 하는 고민이 생길 만도 하다.
증권사들은 ‘수익구조 개선’, ‘투자은행(IB)화’라는 동일한 화두를 머리에 이고, 저마다 해법 마련에 분주하다.
1월 중순 대우증권은 마케팅 조직을 주식, 선물옵션, 자산관리 파트로 세분화했다.
선물옵션, 자산관리 부문의 성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경쟁사들보다 이들 부문이 취약했던 것을 감안해 해당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겠다는 의도다.
신한지주는 지난해 12월부터 신한은행 여의도, 삼성동, 분당 등 3개 지점 VIP룸에 신한증권 증권 라운지를 설치해 신한은행 고객을 신한증권 고객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삼성증권은 황영기 사장이 지난해 10월 고객위탁금·기업금융·자산관리영업의 비율이 각각 6 대 2 대 2이던 수익구조를 3 대 3 대 3으로 맞추겠다고 선언한 이래 실무진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종금사와 합병한 증권사들은 1월초부터 여수신 등 종금업무 강화에 나섰다.
1999년에 LG종합금융과 합병했던 LG투자증권은 종합금융사업부를 신설해 기존 금융상품사업부가 수행하던 종합금융업무를 분리·강화했다.
LG투자증권은 “수익성을 높이는 동시에 투자은행으로서 초석을 다지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동양현대종합금융과 지난해 12월 합병한 동양종합금융증권은 기업어음관리계좌(CMA)와 자발어음 등 종금 상품을 증권사에서도 팔 수 있도록 금융감독원에 허가를 요청했다.
이로써 합병의 시너지를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동양증권의 요청이 받아들여지면 종금 상품과 증권 상품을 동시에 취급할 수 있어, 종금사 합병 증권사 지점들은 투자은행화란 목표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업계에서는 “동양 합병이 정부에 의해 이뤄진데다 종금사들이 초토화돼 종금 업무가 공백 상태인만큼 긍정적 결과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낙관론과 “다른 증권사들과 형평성 차원에서 일부 증권사에만 혜택을 주는 선택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이 엇갈리고 있다.
금감원은 아직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이렇게 증권사들이 저마다 새로운 생존 방정식을 모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모습은 겉보기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위탁수수료는 여전히 증권사 주 수입원의 60~70%를 차지하고 있고, 증권·은행·보험간 업무 칸막이는 여전히 높다.
시장점유율도 거의 변동이 없다.
LG투자증권의 분석자료를 보면 시장점유율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삼성증권 4분기 점유율은 9.3%로, 여전히 10%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4분기 2위인 LG투자증권은 1년 내내 점유율 8.2~8.4%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도 다른 증권사들과 격차가 크지 않다.
4분기 점유율 3위인 현대증권은 8.1%, 4위 대신증권은 8%로 박빙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증권사들의 재무구조나 소유구조를 봐도 시장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여지가 없어 보인다.
부실채권을 안고 있던 은행들은 어찌됐든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또 대부분의 은행들을 사실상 정부가 소유하고 있던 터라 정부가 구조조정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증권사들은 현재 재무구조가 안정돼 있다.
특히 삼성, LG, 대신, 대우, 현대 등 대형사들의 순영업이익률은 모두 100%를 넘는다.
게다가 소유권은 대우증권, 현대의 금융3사를 제외하고는 대개 민간에 있다.
즉 정부가 M&A를 강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올해엔 증시까지 호황이라 배 부르고 등 따스운 증권사들이 구조조정에 조급증을 보일 이유가 없다.
LG투자증권 홍진표 연구원은 증권업 지수가 앞으로 42%는 더 오를 수 있다고 내다본다.
이런 상태로는 증권사들의 성장성이 아주 높아질 여지도, 아주 낮아질 여지도 없다.
하지만 이것은 팽팽한 고요다.
지난 1년 동안 증권사들은 고작 0.1~0.5% 시장을 사이에 두고 엎치락뒤치락 순위 싸움을 벌여왔다.
2분기엔 사이버 트레이딩 시장의 강자 대신증권이 시장점유율 8.8%를 기록해 삼성과 LG를 0.1%포인트, 0.7%포인트씩 앞지르고 1위를 차지했다.
4분기엔 현대증권이 대신증권을 0.1%포인트 차이로 따돌렸다.
이 정도 경쟁 상황이면 다른 산업은 지금쯤 구조조정에 들어갔을 것이다.
대우증권 황준호 기획실장은 우리 증권업계의 허핀달허쉬만(HH)지수가 500이 넘는다면서 산업재편 단계에 진입할 만한 여건이 충분히 성숙했다고 말한다.
HH지수가 1만이면 독점, 1천에서 2천 사이면 완전경쟁 상태로, 우리 은행업계는 HH지수가 2천 이하로 내려가면서 합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HH지수 500선인 시장이라면 기업간 구조조정이 일어나고도 남을 만한 수치다.
위탁수수료에 편중된 수익구조는 장기적으로 볼 때 수익 유지에 대해 불안감을 안겨준다.
지금 구조에서 증시가 하락하면 수지는 언제든지 마이너스로 돌아설 수 있다.
LG투자증권 홍진표 연구원은 수입원이 한군데 집중되어 있으면 재무위험이 커진다고 지적한다.
그는 우리 증권업체들의 위탁수수료 비중이 때로 90%에 육박하기도 한다면서 변동성이 큰 수익구조에 우려를 나타낸다.
사실 증권업은 산업 특성상 변동성이 클 수밖에 없다.
위탁수수료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 증권사뿐 아니라 이미 투자은행으로 사업을 확대한 미국 증권사들 역시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미국 1위 증권사 메릴린치는 지난해 한해 동안만 전체 직원의 20%가 넘는 1만5100명을 줄였다.
메릴린치는 투자은행 업무에서 세계적으로 선도적 지위를 확보한 회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악화로 투자은행 업무의 절대량이 줄어드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경쟁사인 모건스탠리딘위터, 골드만삭스, 시티그룹의 살로먼스미스바니도 인력 감축과 사업 정리를 지난해 단행했다.
하지만 이들 기업들은 그나마 수익증권, 랩어카운트 등 자산관리 부문의 비중을 키워 변동성이 큰 증권산업의 위험요소를 줄여나가고 있다.
우리 증권사들은 그렇지 못하다.
삼성증권만이 수익원의 20%를 자산관리 분야에서 충당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증권사들은 자산관리 수익비중이 10% 안팎에서 맴돈다.
그만큼 증시 부양과 주식 회전에 목매달 수밖에 없다.
관건은 어떤 요인이 증권업과 증권사에 구조조정을 촉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보증권 신규광 연구원은 “대형 증권사들끼리 합병해 시장점유율 16% 정도 되는 증권사가 나오면 시장 변화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LG투자증권 홍진표 연구원은 “은행·증권·보험간 업무 칸막이가 무너지면 고객 접점이 많은 은행이 이긴다”고 말한다.
대형 금융지주회사의 출현이 증권업의 구조조정을 촉발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증권사와 증권사의 결합이든, 증권사와 은행의 결합이든 대형 합병으로 선도기업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증권산업의 판도 변화는 아직도 먼 미래의 일로 보인다.
혹시 대우증권과 현대그룹 금융3사가 또다른 대형 증권사나 대형 은행에 매각된다면 이 팽팽한 고요가 깨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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