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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임재경 대기자의 유로화 현장탐방 ④ 물가불안 우려에 숨죽인 유로존
[글로벌] 임재경 대기자의 유로화 현장탐방 ④ 물가불안 우려에 숨죽인 유로존
  • 프랑크푸르트=임재경/ 언론인
  • 승인 2002.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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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화페도입이 인플레 유발하지 않을까 긴장… 아직까지 큰 가격 동요는 없어

열차는 토요일 정오를 조금 지나 독일 프랑크푸르트역에 도착했다.
내 친구로, 40년 가까이 독일에 거주해온 은퇴한 화학자 L박사가 마중 나왔다.
그와 점심을 먹으러 가는 자동차 안에서 일요일에 문을 여는 책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중급 이상의 음식점을 빼놓고는 일요일에 문을 여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면서, 무슨 책이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편할 텐데 여행하면서 무거운 책을 어떻게 갖고 다니려고 하느냐고 흉을 봤다.


“허허, 저널리스트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군!” 하고 대꾸해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려면 서울에서 하지, 왜 프랑크푸르트까지 날아와? 책방에 가서 서가를 둘러보는 것처럼 중요한 취재가 없다는 것을 그대가 알 턱이 있나…. 브뤼셀에서 쾰른까지는 조느라, 쾰른에서 프랑크프루트까지는 독일인 건설업자와 초보적인 경제담론을 나누느라 활자로 된 것은 무엇 하나 들여다볼 틈이 없었다.
어려서는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소설 읽는 것이 비할 데 없는 즐거움이었고, 저널리스트가 되고 나서는 열차 안에서 신문·잡지 보따리를 들추며 내 나름의 작업을 일삼았다.
반나절의 ‘인쇄물 굶주림’은 단순한 시장기와는 다르게 죄를 짓는 느낌을 일으켰다.
그래서 신문 파는 데 있으면 차를 세워달라고 했으나, 아침도 먹지 못한 주제에 무슨 신문이냐고 L박사는 또 핀잔이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외국여행 중 신문을 사는 데서는 동행인의 반대의견에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내 고집이 끝내 관철됐다.
유로화 도입, 그 이후는? 유로화 관련 정보를 모으느라 나로서는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지만, 정작 유럽연합(EU)의 화폐 단일화가 초래할 정치사회적 변화와 국제관계에 미칠 파장에 대해서는 준비가 너무나 덜 된 상태였다.
초중등학교 학생이 기말시험을 당일치기로 준비하듯 여행하며 주워들은 토막지식들을 꿰매는 식의 취재는 분초를 다투는 사건기사를 쓸 때나 하는 일이라고 다짐한 것도 벌써 꽤 여러 해 전의 일인데, 제 버릇 개 주지 못한다는 속담대로 되어가는 꼴이다.
유로존 열두나라의 개별 통화들을 유로화로 교환하는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그 다음은?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건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신문 보따리를 풀고 괴테를 낳은 자유도시 프랑크푸르트가 세계적 명품의 하나로 뽐내는 신문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FAZ로 약칭. www.faz.de)를 펼쳐들었다.
이 신문의 편집성향이 보수우익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동일한 보수우익 신문이라도 저질의 황색지인 <빌트>(Bild)와는 대칭대는 고급 정론지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우익 이론가이며 논객인 레이몽 아롱이 1986년 작고했을 때 프랑스의 공산당 기관지 <위마니테>는 그를 가리켜 “비록 아롱은 우리의 적이었지만,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 격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대”라고 했다던데, 나는 FAZ가 그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는 신문이라고 믿는다.
펼쳐본 1월5일자 FAZ는 1면 머릿기사를 팔레스타인 관련기사로, 중간 톱을 아르헨티나의 금융위기 기사로 각각 처리한 것까지는 다른 신문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1면 좌측상단의 1단짜리 기사는 ‘지방법원, C&A의 특별할인 세일을 금지하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고, 우측상단의 사설은 이 문제를 취급하면서 제목을 간략하게 ‘성년’(成年, Mundig)이라고 달았다.
EU의 단일 화폐에 줄곳 회의적이었던 독일 사람들이 은행창구 앞에 줄을 서가며 그 애지중지하던 마르크화를 서둘러 유로화로 바꾼 것은 촌티를 벗어버린 “깜짝 놀랄 일”인데, 세일 광고에 속아 무턱대고 충동구매를 일삼을 정도는 아니므로 규제를 가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공권력의 간섭이라는 것이었다.
사설은 “투표권을 행사하는 만 18살 이상의 성인은 소비자로서도 믿을 만하다”고 결론을 맺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앞서 그날 아침 열차에서 만났던 독일인 건설업자가 불만스러워했던 행정규제를 보수우익 신문인 FAZ가 철폐하라고 여론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었다.
아니, 거꾸로 독일의 많은 시민들이 FAZ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열차 안에서 만났던 건설업자는 사업가치고는 너무나 정연한 우익논리를 편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FAZ와 같은 보수우익 신문을 매일 아침 열심히 읽는 게 틀림없구나 싶었다.
그 다음 페이지를 들추던 나는 경제면(12쪽)에서 “옳지!” 하며, FAZ의 진면목을 확인했다.
‘이게 메탈(IG Metall:독일 강철노련): 우리는 역풍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제목 아래, 우리 글로 치면 200자 원고지 30장은 넉넉히 될 만큼 긴 분량의 기사가 실렸다.
거기엔 이게 메탈이 노동생산성 상승률, 예상 소비자물가 상승률, ‘노동자의 재분배 몫 및 손실임금 보전’ 등을 고려해 올해 단체협약에서 5~7%의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씌어 있었다.
FAZ는 이게 메탈의 이런 요구와, 그에 대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대응이 노동계 전반에 미칠 영향을 비교적 균형있게 소개했다.
기세 떨치는 신보수주의 논리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경제면에는 좀처럼 사진을 쓰지 않던 이 신문이 노동자들이 데모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가로 20cm, 세로 15cm 크기로 실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진에 찍힌 사람 수는 고작 8~9명이었는데 그들은 미소짓는 표정에, 이게 메탈의 깃발을 든 정도여서 전투적인 냄새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FAZ가 굳이 이 사진을 실은 의도는 기사에 주목을 끌려는 데 있었음이 역력했다.
FAZ는 또 시민들의 판단을 반(反) 노동쪽으로 유도하려는 속셈에서인지, 만하임에 본부를 둔 ‘유럽경제연구센터’(ZEW)의 볼프강 프란츠 소장과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다.
그는 FAZ 기자와의 일문일답에서 “설사 이게 메탈의 요구가 임금협상에서 관철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요구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조심스런 경기상승 국면에서는 투자의욕을 냉각시킬 것이다.
노동자 임금 상승분이 내수를 진작시킨다는 주장은 케케묵은 이야기이며, 임금 상승은 노동생산성 상승 한도 안에서 이루어질 때에만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자들끼리의 거친 말투로 하면 “그 친구 경영인 단체로부터 돈 얼마나 먹은 거야”라는 반응이 나올 만큼 신보수주의 사상에 치우친 것이었다.
FAZ의 명성과 영향력이 열차 안에서 만났던 건설업자와 같은 독일의 평균적인 보수층 독자들 사이에서만 그친다면, 이 신문의 인쇄부수가 30만부 안팎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다음날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의 주선으로 어렵사리 만난 유럽중앙은행(ECB) 직원과 ‘헤센주 은행’(Hessische Landesbank, 약칭 Helaba:독일은 각 주(州)마다 주정부의 공금을 취급하는 란데스방크가 있음) 중간급 간부 세사람과의 대화에서 FAZ의 위력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발언은 FAZ의 보도·논평과 어쩌면 그렇게도 같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들이 평소에 매일 아침 30분씩 FAZ를 읽는다면, 나를 만난 이날은 1시간쯤 읽었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했다.
독일에서 보수층, 특히 ‘교양있는 보수층’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을 만날 필요 없이 FAZ를 꼼꼼히 읽는 편이 훨씬 능률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상승율 2.5%” 이 글을 쓰는 날 아침 인터넷을 통해 읽은 미국 <뉴욕타임스> 2월2일자는 프랑크푸르트에 주재하는 에드먼드 안두루즈 기자의 현지발 기사에서 “유로화 도입 후 1개월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5%에 달함으로써 유로존에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고 보도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이 신문은 엉뚱하게도 이게 메탈이 요구한 6.5%의 임금인상이 인플레이션의 한 원인으로 작용할 것이라 했다.
안두루즈 기자는 독일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니 FAZ를 열심히 읽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이미 터득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게 메탈의 임금인상 요구가 실현될 것인지도 전혀 불투명한 시점에서, 그것과 인플레이션을 연결시킨 보도 태도는 너무 앞질러 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은 FAZ의 해설과 논평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이처럼 FAZ는 독일뿐 아니라 전 지구적 규모의 우경화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 대륙의 큰 세나라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지난 한세기 동안 인플레이션에 시달린 경험 때문에 유로화 도입이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않을까 걱정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가격의 동요는 매스컴이 떠들어댄 것과는 달리 크지 않았다.
단지 개별통화를 유로화로 바꿀 때 남는 끝자리 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독일의 경우 일반적으로 소비재의 최종 소비자 가격이 예를 들어 X.90DM(도이체마르크) 혹은 XX.85DM로 돼 있었는데, 이것을 유로화 단위로 바꾸면 상당수가 X.12 혹은 XX.11로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인들은 끝자리를 잘라 그만큼 덜 받느냐, 아니면 예전 방식대로 끝자리 수를 다시 올리느냐를 고심하고 있어, 앞으로 새로 정착할 소비자 가격이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한 관건의 하나다.
다량으로 생산되는 제조 상품은 1년 이상 유로화와 개별통화 가격을 병기해놓은 터라 별 문제가 없으나, 채소 과일 육류 등은 그와 다르다.
이 때문인지 1월 중 독일의 무값은 75%나 올랐다.
(다음호에 계속)

마피아자금 유로화로 바꿔? 말어?

유로화의 교환이 개시된 2002년 1월1일은 유로존 역내의 은행들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 깔려있는 범죄자들에도 긴장된 순간이었다.
이른바 지하경제의 탈세자들과 돈 세탁을 해야 하는 범죄조직들이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이었다.
현행법상 개별 국가들의 구 화폐는 법정통화인 까닭에 은행이 교환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유럽연합(EU) 가맹국들에서는 ‘돈세탁 방지법’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일정 금액 이상의 현금을 은행에 예치하거나 유로화를 포함한 여타 통화로의 교환을 요구할 때는 자금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의 경우는 자금출처 신고의무의 상한액이 3만DM으로 돼있다.
그러므로 거액의 현금을 유로화로 교환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곧 출처불명의 현금 보유를 세무관서를 포함한 국가기관에 알리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2월말로 끝나는 신·구권 혼용 시기가 지나면, 미교환 구권은 자동적으로 휴지가 된다.
구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 마피아들은 그들이 그동안 긁어모은 돈을 달러화보다 마르크화로 보유하기를 선호했고, 이 때문에 수백억DM에 이르는 현찰이 어느 곳엔가 숨겨져 있을 것으로 독일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불법 현금통화의 일부는 유로화 도입이 기정사실화하자 돈 세탁 감시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지중해 연안 국가(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에 흘러들어가 부동산 매입, 최고급 승용차 구입 등으로 실물자산화했고, 그 결과 스페인의 지중해 연안 관광지역 땅값이 지난 1년새 40%나 폭등했다고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최근 보도했다.
지하경제 및 범죄에 연관된 통화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구 통화의 일부는 발행된지 오래되어 유실되기도 했고 일부는 유로존 시민들이 기념으로 간직하려고 한다.
이로 인해 유로존 12개국 중앙은행들은 총 4백억유로의 잉여를 누릴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구권 교환에 소요된 비용을 감안해도 그 상당 부분이 남아, 하늘에서 내린 선물이나 다름 없다.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나를 두고서도 입씨름이 한창이지만, 그 귀속처는 물론 국가다.
이를테면 아일랜드는 화폐발행고의 5%에 해당하는 2억7천만유로를 미교환액으로 추정하고, 그 돈을 전액 국가연금기금에 출연하기로 결정했고, 프랑스는 미상환 예상금액 7억7800만유로를 2002년도 정부수입으로 잡아 이미 예산에 계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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