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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책읽기] 셜록 홈즈 전집
[이권우의책읽기] 셜록 홈즈 전집
  • 이권우 / 도서평론가
  • 승인 2002.02.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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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히 떠오르는 다락방의 추억 어릴 적에는 참 이사도 많이 다녔다.
부모님에게는 이사하는 것이 불편하고, 마음 아픈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철없는 어린아이들에게 이사는 즐거운 일이 되기도 했다.
이사가 즐거웠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장롱 밑에 들어간 동전을 찾을 수 있어서였다.
먼지구덩이에서 동전을 주울 때의 기쁨이란. 그것도 여전히 광택을 잃지 않은 새 동전을 만났을 때의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락방에는 또 얼마나 많은 추억이 담겨 있던가. 다락방은, 비유하자면 낡은 사진첩 같은 곳이다.
하지만 그 사진첩을 들춰보면 찍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총천연색 사진이 끼어 있게 마련이다.
허섭쓰레기를 올려놓는 다락방은, 그래서 어린 영혼들에게는 보물창고였다.
켜켜이 쌓여 있는 잡동사니 가운데 당장 쓸 수 있는 온전한 물건이 있을 때의 환희란. 이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전집>(황금가지 펴냄)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은, 엉뚱하게도, 어린 시절 이사갈 때의 즐거움과 다락방에 얽힌 추억이었다.
그만큼 셜록 홈즈는 어릴 적의 독서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아련한 그 무엇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언제 처음으로 셜록 홈즈를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셜록 홈즈는 분명 내 어린 시절의 영웅이었다.
이것은 내 개인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다.
영웅이라 하면, 운명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을 열기 위해 장렬한 최후를 기꺼이 맞이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뛰어난 추리력밖에 없는, 지극히 냉소적인 사립탐정을 영웅으로 맞이했다.
나는 태생적으로 이지적인 것을 선호한 것인데, 하지만 세상에 나가 큰 일을 이루기에는 애초부터 그릇이 작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래 전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추억의 여인을 만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름다운 추억만은 훼손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 두려움을 마음 한편에 안고 읽은 <셜록 홈즈 전집>은, 그러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건재했으며 지금도 나의 영웅이 될 만했다.
셜록 홈즈가 세월의 무상함을 견뎌낸 것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은 수사(修辭)와 비유의 힘에 있었다.
“삶의 무채색 실꾸러미 속에, 주홍빛 살인의 혈맥이 면면히 흐르고 있어요. 우리가 할 일은 그 실꾸리를 풀어서 살인의 혈맥을 찾아내어 그것을 가차 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라든지 “더 높으신 판관께서 그 사건을 맡으셨고, 제퍼슨 호프는 준엄한 심판이 내려질 하늘의 법정으로 소환당했다”등이 대표적인 예다.
만약 셜록 홈즈와 뤼팽이 맞대결을 벌이면 누가 이길까. 어릴 적 손에 땀을 쥐며 읽은 추리소설 가운데 이를 주제로 삼은 책이 있었다.
셜록 홈즈가 마침내 뤼팽을 잡았는데, 뤼팽은 홈즈의 명민함을 인정하고는 탈출에 성공했다.
<셜록 홈즈 전집>을 펴내는 출판사에서 <뤼팽 선집>도 출간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 허탈했던 마음마저 떠올라 겸연쩍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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