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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제임스 토빈 / 미 예일대 명예교수
[사람들] 제임스 토빈 / 미 예일대 명예교수
  • 백우진 기자
  • 승인 2002.03.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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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는 두 부류로 나뉜다.
한쪽에서는 경제에서 진행중인 흐름을 설명하고 뒷받침하는 논리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다른 편에서는 기존의 조류를 개선하거나 뒤집기 위한 근거와 수단을 제시한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시장경제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반면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붕괴와 사회주의 도래의 역사적인 필연성을 강조하며 그 필연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을 선언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임스 토빈은 일단 후자에 든다.
토빈은 단기자본의 투기적 이동이 일으키는 폐해를 막기 위해 외환거래에 세금을 매겨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가 1972년 내놓은 이 방안은 ‘토빈세’로 불리며, 특히 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폭넓은 관심을 일으키는 동시에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토빈세로 걷은 세금은 빈곤퇴치에 활용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한편 토빈세와 같은 취지에서 투자 외환의 일정 비율을 중앙은행 등에 예치하도록 의무화하는 가변예치의무제(VDR)도 이목을 끌었다.
토빈세에 대한 지지는 미국이 키를 잡은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움직임에 다름 아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대표주자로 뛴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변주된 뒤 90년대 이후 대세로 자리잡았다.
반면 토빈은 케인지언 경제학을 다듬는 데 주력했다.
경제학계에서 신자유주의의 반대편에 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류 경제학자의 컨센서스를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좌파에서 ‘워싱턴 컨센서스의 집행기구’라며 비판하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을 옹호했다.
자유무역 때문에 빈곤이 심화된다는 주장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좌파로부터의 호응을 마뜩찮아한 것도 당연했다.
지난해 독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갈채가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엉뚱한 곳이란 미국 노조인 AFL-CIO, 영국 사회운동 단체인 ‘빈곤과의 전쟁’(War on Want) 등을 가리킨다.
토빈은 “그들이 내 이름을 도용했다”고 비난했다.
토빈은 주요 국가들과 IMF, 세계은행 등이 의견을 모아 토빈세를 채택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은 반대했고 IMF는 이따금 부정적인 시각에서 거론할 뿐이었다.
사실 토빈세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아이디어였다.
조세피난처(tax haven)를 포함해 모든 국가에서 토빈세를 채택하지 않는 이상 외환투기와 이로 인한 국제금융시장 동요를 피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VDR도 칠레에서만 운용되다가 98년 이후 사실상 폐기됐다.
토빈세를 제외하면, 그의 연구는 경제학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포트폴리오 선택이론’으로 81년 노벨상을 받았다.
포트폴리오 선택이론은 투자자들이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자산을 다양하게 구성한다는 것을 말한다.
노벨상 수상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를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안 된다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토빈 이전에는 투자자들이 위험과는 무관하게 최고의 수익률만 추구한다고 여겨졌다.
‘토빈의 q’ 이론은 시장에서 평가한 기업가치, 즉 시가총액이 그 기업의 실물자본 대체비용보다 클 경우 투자가 촉진된다는 얘기다.
반대로 주가가 실물자본에 비해 저평가됐다면 기업들은 새로운 투자를 벌이는 대신 다른 기업을 인수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토빈은 지난 3월11일 84살을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미국 일리노이주 샴페인에서 태어나 39년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30년대 하버드대는 조지프 슘페터, 바실리 레온티에프 등 쟁쟁한 교수진을 갖춘 지적인 ‘용광로’였다.
폴 새뮤얼슨, J. K. 갈브레이스 등은 갓 임용됐거나 대학원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대공황의 충격으로 기존 경제학은 지반이 붕괴된 상태였다.
경제학자들은 대공황을 진단하고 처방할 새로운 틀을 활발히 모색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토빈은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을 주장한 케인스의 이론에 빠져들었다.
이후 ‘경제학자는 당대의 이슈로부터 벗어나 상아탑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견지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으로 복무한 뒤 하버드로 돌아와 4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50년 이후 예일대에 몸담았다.
61~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윈회에 참여하면서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재정정책을 제안했고, 81년 레이건 행정부가 ‘공급경제학’에 따라 감세조치를 취하자 “빈부격차를 벌릴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경제학 에세이>를 비롯해 16권의 저서와 500여편의 논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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