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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지역경제 현장을 가다-16회 제주
[기획] 지역경제 현장을 가다-16회 제주
  • 제주=이경숙 기자
  • 승인 2002.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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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바람에도 와르르 잎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온갖 나무와 꽃이 낭창낭창 우거진 한림공원의 벽돌길을 걷는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헤매면서도 와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봐라봐라, 여가 아까 왔던 데 아이가?” “맞구마. 어이 보소. 쌍용동굴 갈라믄 어디로 가야 되능교?” 북제주 한림읍 협재리 한림공원. 제주시에서 버스를 타고 40여분 거리인 이곳은 30년 전엔 모래벌판이었다.
창업자 송봉규 회장은 1971년부터 수천톤의 복토(覆土)를 끌어와 부었다.
황무지 모래벌판은 2천여종 2만그루의 나무가 뿌리를 내린 기름진 땅이 됐다.
30년 전 씨를 뿌린 카나리 야자는 지금은 한아름으로 모자란 거목으로 자랐다.
그 사이 한림공원은 연간 관람객 120만명, 매출 40억원, 이익 10억원의 튼실한 기업이 됐다.
마흔살부터 나무를 심어 이제 일흔두살이 된 송 회장은 차남 송상훈(47) 사장에게 9만평 녹지공원을 물려줬다.
협재해수욕장에서 만난 조랑말 역마차꾼은 “한림공원 덕에 협재리 사람들이 잘 먹고 산다”고 말한다.
협재리의 흰 모래밭과 맑은 바닷물만으로는 지금만큼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올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조랑말을 타는 손님이 아무도 없는데도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먹던 잔에 커피를 따라 건넨다.
“송 회장이 마을을 하영(많이) 도와좀수다.
저번에 지서준(지어준) 마을회관도 한 수천,수억원 들었을 거우다.
” 성공한 향토 사업가가 적은 제주에서 십수년 동안 송 회장은 덕망 높은 사업가이자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림공원에서 10분 거리에 제주 토박이들의 신화가 또 하나 있다.
현성호(작고)씨, 현정국 회장, 현승탁(54) 사장 등 3대째 이어진 한라산 소주주식회사다.
한라산 지하수로 만드는 술이라 해서 산자락에 있는 줄 알았더니 공장은 옹포리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다.
월계천 물을 쓰기 때문이란다.
북제주 한림읍 옹포리로 흐르는 월계천은 유일한 약알칼리성의 물이라, 이 물로 술을 빚으면 술맛이 아주 부드럽단다.
현승탁 사장은 “술맛은 곧 물맛인데 한라산의 물맛은 세계적인 것”이라며 “허벅술을 빚는 물은 한라산 물 중에서도 좋기로 이름난 월계천 지하수로 만든다”고 자랑한다.
이 회사는 1950년 현 사장의 할아버지인 고 현성호씨가 창업한 호남양조장에서 비롯했다.
당시 제주시 지역을 중심으로 시장기반을 닦던 호남양조장은 70년 정부시책에 따라 하귀, 한림, 서귀포, 표선, 성산포 5개 지역의 양조장과 통합됐다.
이것이 한라산소주의 전신인 한일주식회사였다.
한라산소주가 현재와 같은 명성의 기반을 닦은 것은 92년 현정국 회장, 현승탁 사장 시스템이 구축된 뒤부터였다.
이들은 93년 한라산소주, 95년 허벅술, 96년 백록담, 97년 한라산물 순한소주, 98년 과일주용 소주 등 신상품을 잇따라 내놓으며 시장을 공략했다.
99년엔 회사 이름을 아예 한라산으로 바꿨다.
현재 한라산소주는 제주 소주시장의 97%를 장악하고 있다.
지난해보다 시장점유율이 4%포인트 가량 늘었다.
일본, 미국, 브라질 등 수출량도 증가 추세다.
특히 허벅술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한일 제주정상회담 때 하시모토 일본 총리가 매우 좋아했다고 해서 ‘하시모토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00년 남북장관급회담 때엔 허벅술이 만찬자리에 올라 김용순 북한노동당 비서, 전금진 단장 등 북측 인사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연 매출은 꾸준히 증가해 95년에 150억원이던 것이 지난해엔 280억원까지 늘었다.
제주내 민간기업 중에선 최고의 매출이다.
한라산소주의 명성을 감안하면 매출규모가 더 커야 마땅할 것으로 보이지만 한라산소주 현순국 부사장은 “이익을 낼 수 있는 범위에서만 생산량을 늘린다”고 말한다.
물을 제외한 한라산소주의 모든 재료는 뭍에서 들여온다.
따라서 물류비용이 만만치 않게 많이 든다.
한라산소주의 출고가는 다른 지역 소주보다 200원 가량 비싸다.
게다가 육지나 수출되는 술은 공병 회수가 되지 않으므로 팔면 팔수록 손실이 생긴다.
회사로선 육지나 외국에 시장을 키우느니 차라리 제주 판매량을 늘리는 게 더 실속 있는 장사인 셈이다.
한라산소주는 ‘동네곳간’을 자처한다.
대동제니, 학과 일일주점이니 하는 대학 행사는 물론 동네 체육대회, 경로잔치까지 제주 전역에서 시시때때로 지원 요청이 들어오지만 마다하는 법이 없다.
이렇게 나가는 돈과 술이 한해에만 수억원에 이른단다.
어쩌면 제주사람들은 물맛보다 인심맛에 한라산소주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한림공원과 한라산소주의 정반대편, 남제주 바위밭에서는 새로운 제주 신화의 싹이 트고 있다.
삼영관광 강재업(61)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제주도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지정된 3개단지 20개지구 투자가 중 유일한 도민 자본가다.
그가 경영하고 있는 삼영교통은 연 매출 50억원, 직원 200여명으로 제주도에서 두번째로 큰 운수업체다.
제주시에서 택시로 한시간, 성산 일출봉에서는 택시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미천굴 관광지구 ‘일출랜드’의 공사장을 찾아갔더니, 검은 얼굴에 땀내 나는 나이든 인부가 반갑게 맞이한다.
그가 강 대표였다.
다이너스티를 타고 다니는 지역유지답잖게 그는 흙 묻은 작업복과 땀에 전 모자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되레 “양복 입었을 때 날 만났던 사람은 이러고 있는 날 보면 못 알아보더라”며 은근히 재미있어 한다.
공사장에서 자란 진돗개 두마리가 그의 발치에 누워 인터뷰 내내 그를 지킨다.
5월28일 개장하는 일출랜드를 개발하는 데 꼬박 4년이 흘렀다.
이곳 투자총액에 대해 한 지역일간지는 100억원이라고 보도했고 도청은 홈페이지에 570억여원이라고 써놨지만 막상 당사자는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고 갸웃거린다.
지구 조성에 쓰인 나무와 돌은 그가 몇년 동안 조금씩 사모으고 여기저기서 얻어왔다.
그래서 도무지 얼마가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10여년 전부터 그는 그저 나무가 좋아 황무지를 사고 나무를 심었다.
97년 일본 벳부 온천지대의 관광지구를 가본 뒤 그는 “제주 동부에도 이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현장감독을 따로 쓰지 않았다.
그가 직접 한그루 한그루 심을 나무를 고르고, 바닥에 깔 좋은 돌을 골랐다.
당장 큰 수익을 내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는 “10년은 지나야 경관이 나올 것”이라며 “100년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는다”고 말한다.
그와 18여년 거래했다는 신한은행 고승만 제주시 지점장은 그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제주에선 사업하다가 어지간하게 성공하면 도의원, 시의원에 출마하곤 하는데 강 대표는 그런 유혹이 들어와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원에 출마한 기업가 중엔 가산을 탕진하고 사업까지 넘어간 사람이 적지 않단다.
고 지점장은 강 대표가 한꺼번에 투자규모를 늘리지 않고 자기자본으로 조금씩 사업기반을 다져놓은 것도 현명한 처사라고 칭찬한다.
분재예술원 등 버티지 못하고 망한 관광단지들은 대출받아 사업을 늘리다가 망했다.
장기투자가 요구되는 관광지구는 제조업처럼 1, 2년 만에 수익을 낼 수는 없다.
한림공원, 산굼부리 등 기존의 성공한 관광단지들도 자기자본으로만 꾸준히 몇십년간 투자한 끝에 지금은 안정적 수익을 올리고 있다.
한림공원 송봉규 회장, 한라산소주 현승탁 사장, 삼영관광 강재업 사장. 제주 사람들은 이들이 단순히 성공담의 주인공이라서, 또는 제주 토박이 기업가라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제주 특유의 환경과 제주사람들의 정서에 눈높이를 맞춰 사업을 펼친다.
한림공원과 삼영관광은 기존의 자연환경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황무지를 개발해 제주의 관광자원을 늘린다.
또 이익을 직원과 회사가 공평하게 분배해온 삼영교통은 20년 동안 노사분규가 한번도 없었다.
한라산소주는 수질오염 방지시설을 잘 갖춰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또 이익의 일부를 꾸준히 지역발전 사업에 기부한다.
이런 모습은 제주사람들에게 “역시 토박이 기업이 믿을 만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준다.
제주사람들은 자연환경을 훼손할 가능성이 높은 사업에 대해선 반사적으로 강한 반발감을 나타낸다.
경제활동인구의 절반이 농림어업, 관광업 등 제주의 자연환경 그 자체에 기반한 업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환경탑동 개발사업, 골프장 건설 등 많은 개발사업들이 주민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쳤었다.
그리고 이런 사업들은 대부분 ‘외지인’이 주도했다.
제주사람들은 84년에 벌어진 ‘이정식 투기사건’을 아직도 기억한다.
서귀포 도시개발 기본계획의 기술용역을 맡았던 그는 계획안 정보를 이용하여 미리 개발 예정지를 사들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됐고, 그가 부당하게 얻은 이익도 사회에 환원되지 않았다.
그외에도 많은 ‘외지인’들이 80년대 경제개발 때 위장 전입해 개발이익만 쏙 빼먹고 나가버렸다고 제주 지역신문은 전한다.
국제자유도시, 조세제한특별법으로 가장 큰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되는 주요 관광시설의 주인도 제주사람이 아니다.
롯데호텔, 제주신라, 파라다이스호텔, 서귀포칼 등 제주의 대표적 호텔을 비롯해 8개 골프장이 모두 그렇다.
나인브릿지는 제일제당, 크라운은 삼영화학, 오라는 대림그룹, 다이너스티는 현대, 파라다이스는 정낙원 회장의 파라다이스그룹, 중문은 관광공사 소유다.
새로 짓고 있거나 허가받은 17개 골프장들도 LG, 롯데, 대한항공 등 대기업 자본이 투자한다.
이런 상황이 제주사람들의 밑바닥 정서를 강팍하게 만든다.
제주지역 신문들은 “외지인 제주땅 매입 활발”, “자유도시 개발 참여, 외지인 투자사업에만 각종 인센티브” 같은 제목의 기사를 싣는다.
머리가 하얗게 센 70대 택시 운전사는 “골프장이니, 자유도시니 해봤자 외지인이나 돈 번다”라고 말한다.
한 금융인은 “관광수입이 들어오는 족족 서울로 빠져나간다”고 고백한다.
제주 언론과 학자들은 ‘도내 자본’ 육성론을 펼친다.
이들은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 제주투자진흥지구, 제주자유무역지역 입주자격의 문턱을 도내 기업에는 더 낮춰야 한다고 말한다.
반대로 제주 사람이 안목과 인식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외지’ 자본이 제주에서 돈을 버는 건 경제 흐름을 읽는 눈과 좋은 사업 아이디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제주 토박이다.
‘외지인’으로 제주에서 정착한 한 여행사 사장은 노점상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육지 것이 들어와서 제주에서 돈 좀 벌고 있는데 저런 분들에게라도 돌려드려야죠” 하면서 과일 몇알이라도 사들고 지나간다.
그의 기업은 제주 토박이 기업 이상으로 제주에 잘 자리잡았다.
자주 넘나들면 문턱은 닳는다.
마음의 문턱, 경제의 문턱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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