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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우유업계 무균화 신경전
[비즈니스] 우유업계 무균화 신경전
  • 한정희 기자
  • 승인 2002.05.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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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유업 ESL시스템 도입 둘러싸고… 경쟁업체 “가격상승 요인” 회의적 시각 “솔직히 자꾸 떠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업계에 큰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신경쓸 일도 아니거든요. 이렇게 떠드는 것 자체가 해당 업체가 노리는 마케팅 효과인 것 같아요.” 서울우유 관계자는 이렇게 운을 뗀다.
지난해 9월 매일유업이 무균시설 우유제조과정인 ESL시스템을 도입한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한 업체가 생산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이나 선진적인 공법을 도입하게 되면,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업계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이 ESL시스템에 대해서는 한 업체는 획기적인 시스템이라고 주장한 반면, 다른 업체쪽에서는 필요성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큰 공방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상반된 태도는 소비자들의 판단에 혼란을 줄 우려가 있다.
ESL시스템은 우유의 모든 제조과정을 무균화해서 처리하는 제조공정으로, 이 방법을 쓰면 유통기한을 14일에서 21일 정도로 늘릴 수 있게 된다.
매일유업측은 “우유는 제조과정에서 우유가 닿는 공기나 파이프라인, 나사, 우유팩 등이 2차 오염에 노출되어 있다”며 “이 ESL시스템은 우유가 거쳐가는 모든 생산라인을 무균시설로 만들어 모든 제조공정마다 설비의 세척성, 기기 살균의 수준을 향상시켜 2차 오염을 완벽히 차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울우유와 남양유업은 이 주장이 탐탁지가 않다.
서울우유의 한 관계자는 “마치 현재의 우유생산 공정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면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는 “제품의 신선도는 목장에서 우유를 모으는 것에서부터 식탁에 오르기까지 전 과정의 문제이며, 충전방식을 달리한다고 해서 더 신선해지거나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ESL 공정 제품 장기보전 강점 남양유업의 관계자도 “ESL시스템은 거리가 멀어 배송시간이 많이 걸리는 나라의 경우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필요할지 몰라도 우리나라처럼 거리가 짧고 운송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나라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현재 다른 냉장식품과는 달리 우유의 경우는 유통기한이 5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은 하루라도 최근에 만든 우유를 선호한다.
우유제품의 수입이 규제되어 있지도 않고 심지어 원유가가 외국에 비해 3배 이상 높은데도 국산 우유제품이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바로 소비자가 ‘신선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현 시스템으로도 5일 안에 만든 신선한 우유를 만드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ESL시스템 도입에 반대하는 업체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굳이 비용을 들여가며 ESL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은 “산업적인 측면으로 볼 때도 낭비”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시설투자비 등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 가격상승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한 업체가 새로운 설비를 갖추어서 제품의 신선도를 높이겠다는 데 굳이 말릴 이유는 없어 보인다.
사실 매일유업에서도 현재의 우유공정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전 시스템으로도 문제는 없었다.
그러면 왜 큰 비용을 들여가며 ESL시스템을 도입한 것일까? 이것과 관련해서는 올해 7월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이는 우유의 유통기한 자율화 문제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게 업계 주장이다.
현재 시중우유의 유통기한은 5일로 정해져 있고 우유제품 겉면에 ‘제조일로부터 5일까지’라고 유통기한을 고시해야만 한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자율화되면 유통기간을 제조사 임의로 정할 수 있고 이런 고지를 할 의무도 없어진다.
현재는 제조기한 날짜에서 5일을 역산하면 적어도 언제 제조한 우유인지 알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업계에서는 그렇다고 당장에 혼란스러운 상황이 오거나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울우유 관계자는 “유통기한 자율화가 시행된다 하더라도 우유업체들이 유통기한을 5일 이상 늘리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공정상 유통기한을 늘리는 것에는 이미 한계가 있고, 소비자들이 맛의 신선도에 민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ESL시스템을 도입한 매일유업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매일유업의 말대로 우유의 품질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통기한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면 매일유업으로서는 결과적으로 이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7월 유통기한 자율화 의식 의견 맞서 하지만 매일유업은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매일유업 마케팅부 박성완 팀장은 “1960~70년대까지는 원유품질이 떨어졌고 기술이나 유통환경이 저급해서 5일자를 고수해왔지만 지금은 기술이 많이 발전해 유통기간에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유통기간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은 제조업체들의 자신감이며 책임의 문제”라며 “단지 우리는 품질향상을 위해 이를 빨리 도입했을 뿐 유통기간 자율화는 부수적인 문제”라고 주장했다.
매일유업은 이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서 현재까지 180여억원을 들였다고 밝혔다.
현재 전체 우유제품의 50% 정도를 이 시스템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올해 말까지 180억원을 더 들여 100%를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업계에서는 이 시스템 도입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있지만, 만약 ESL시스템 제품이 본격화할 경우 외산 우유제품을 시장에 끌어들일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이미 호주나 미국 등지에서는 이런 ESL시스템을 도입한 업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유업계 내부의 소리없는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 농림부와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서 제조일자와 유통기한을 같이 표기하는 방식을 다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농림부 축산국 관계자는 “7월1일부터 살균우유 제조일자와 유통기한 표기가 자율화될 경우, 소비자의 정보 부족 문제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중”이라며 “현재 제조일자와 유통기한을 같이 표시하는 것을 검토중이지만 국제규정과 맞지 않은 부분이 있어 신중히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만약 이렇게 되면 제조일자로부터 유통기한까지가 상대적으로 긴 매일유업 ESL제품의 경우는 장기보존이라는 장점을 발휘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 때문인지 매일유업측에서는 이 제조일자 표기문제가 대두된 것이 ESL시스템 도입에 반대하는 특정 업체들의 적극적 로비 때문이 아니냐고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ESL시스템 도입을 반대하는 업체들은 현재 “ESL시스템 도입문제를 이슈화하는 것은 매일유업의 고도의 전략”이라며 “시중우유는 서울우유가, 분유는 남양이 1위를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매일유업이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마케팅 전략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게 미묘한데도 업체들은 겉으로는 “어떻게 되든 자사는 손해볼 것 없다”는 태도다.
서울우유나 남양유업은 어차피 소비자들은 기존의 소비관행대로 국내업체의 신선한 우유를 찾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이고 있으며, 매일유업은 앞으로의 경쟁력을 위해서는 다른 업체들도 ESL시스템을 도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업체들의 물밑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ESL시스템의 운명은 소비자들의 선택에 맡겨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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