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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아시아가 움직인다
[커버스토리] 아시아가 움직인다
  • 특별취재팀
  • 승인 2002.05.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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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내수 소비 힘받고 급속 회복… 글로벌경제 맞설 개혁과 성장 ‘꿈틀’

아시아 대륙의 경제지도가 바뀌고 있다.
1세기 전 서구열강의 아시아대륙 침탈의 상징이던 홍콩이 중국의 품속으로 귀속된 지도 어느새 5년이 흘렀다.
홍콩 반환이 가져온 파장의 실체는 이제 서서히 눈앞에 드러나고 있다.
대만-중국 관계, 아시아 금융거점 도시간 경쟁, 중-일 경쟁구도, 역내 협력관계 강화 등 변화의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사례는 많다.
올해 하반기에 예정된 한국과 중국의 지도부 교체는 아마도 역내 경제지도의 변화를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여전히 경기침체와 정치 불안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은 역내 경제지도 변화의 또 다른 단면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눈길이 가는 지점은 예전의 활력을 되찾은 듯 보이는 아시아 경제의 현재 상황이다.
주요 경제지표를 살펴보면, 외환위기를 공통으로 겪은 아시아 각국이 위기의 충격에서 빠른 속도로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내 주요 국가들의 외환보유액은 모두 1조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한국의 경우, 은행들의 2001년도 당기순이익이 총 5조원을 넘어선 것을 보면 외환위기 당시와 거리감이 느껴진다.



소비지출 증가로 경기 청신호

아시아개발은행(ADB)은 “미국의 경기회복과 내수시장 성장에 힘입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의 올해 평균 성장률은 4.8%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호주 시드니에 있는 경제연구기관인 ‘BIS 샤프넬’은 “아시아 지역 경제가 1997년의 금융위기 이후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 10년간 연평균 5.1%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고 주저없이 평가했다.


아시아 경제의 두드러진 회복세가 강력한 내수 소비지출에 의해 탄력을 받고 있다는 점도 이채롭다.
한국은 물론 동남아 주요 국가들의 소비지출은 꾸준히 늘어나면서 각국 경제성장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HSBC의 이코노미스트 지오프리 바커가 지적하듯 “수출보다는 내수 소비지출에서 비롯되고 있는 최근의 경기회복 추이는 90년대 후반기의 모습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다.
현재와 같은 소비지출 수준이 유지된다면 미국 경제의 회복이 지연된다고 하더라도 아시아 각국 경제가 스스로 성장할 여력이 충분하다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것 자체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최근의 달러 약세가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 증가세에 제동을 걸 가능성이 우려되고 있지만, 아시아 역내의 내수 소비지출이 계속 강세를 보인다면 그같은 우려도 어느 정도 누그러질 것이다.
95년 이전에는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 통화가 달러화에 고정돼 있었기 때문에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면 아시아 통화들도 동반 하락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시아지역에서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등 3개국 정도 뿐이다.
이들 3개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은 내수 소비지출이 뒷받침돼야 달러화 하락이 경기회복에 주는 불리한 영향을 줄이거나 피해갈 수 있다.


물론 과잉 소비지출의 열기 속에는 위험이 숨겨져 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아시아 경제의 경기회복 과정에는 곳곳에 갖은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
그 하나의 예는 국제유가의 움직임이다.
예를 들어 원유 순수입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3%에 이르는 한국이나 태국 등에서는 국제유가가 급등할 경우 경기회복세가 크게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과연 이제 아시아 경제는 외환위기라는 ‘일시적’ 충격을 말끔히 씻어내고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진입한 것일까? 외환위기라는 광풍이 휩쓸고 간 지 5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안지는 여전히 채워지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외환위기와 그 극복과정은 아시아 경제가 세계경제라는 ‘큰 물’에 예전보다도 더욱 활짝 노출되는 과정이기도 했고, 따라서 이제는 예전에 비해 세계경제의 변화가 아시아 경제에 주는 영향이 커졌다.



주변국 파급효과 날로 커져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경제에서는 과거의 그 어느 시기보다 ‘위기의 지역성’이 커졌다는 사실이다.
92년 북유럽 외환위기, 94년 멕시코 외환위기, 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곧 한 국가가 위기에 빠질 경우 주변 국가들이 여지없이 그 위기에 감염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현실로 보여준 사례다.


굳이 ‘위기’라는 단어를 끌어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 한 국가경제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변화들이 역내 다른 국가들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점점 더 손에 잡힐 듯 분명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제 엔/달러 환율 변동의 여파가 동아시아 신흥국가들에 전달되는 경로는 모든 역내 국가들이 예의 주시해야 할 관찰대상이 된 지 오래다.
대부분의 아시아 역내 국가들의 외환위기 극복과정은 세계시장, 특히 자본시장과의 접촉면을 넓혀나가는 과정이었다.
때문에 최근 회복된 아시아 경제의 성장동력은 위기 이전보다 훨씬 커진 위험요소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5년 전 외환위기를 겪지는 않았지만 그 전부터 10년 넘게 침체에 빠져 있는 일본 경제의 문제도 아시아 경제 전체에 큰 변수이자, 화두가 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조종화 선임연구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일본과 수출에서 경쟁하는 정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는 곧 동아시아 각국의 수출산업 구조가 일본형으로 빠르게 변모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불투명한 일본 경제의 미래만큼이나, 아시아 각국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더욱 커진 셈이다.


지난날의 동아시아 경제발전을 흔히 ‘기러기 모델’로 설명하곤 한다.
한마리의 ‘길잡이’가 앞장서고 그뒤를 이어 한무리의 기러기들이 떼지어 날아가듯, 아시아 경제에서 일본은 후발산업국들이 뒤따라가야 하는 리더였다.
리더와 후발국들 사이에는 아무런 경쟁관계가 존재하지 않았고, 후발국들은 리더가 걸어온 경로를 되짚으며 자연스레 캐치업(catch-up)할 수 있었다.


침체에 중국의 부상이 맞대응하고 있다.
동아시아지역에서는 사업자든, 투자자든, 노동조합 지도자든 중국의 부상을 가벼이 보지 않는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중국은 세계의 신발 공장, 옷 공장 그리고 장난감 공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은 어엿한 세계의 텔레비전 공장, 컴퓨터 공장 그리고 반도체 공장이기도 하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제조업 임금은 필리핀보다 20% 낮고, 말레이시아에 비해선 3분의 1, 태국에 비해서는 4분의 1 수준이다.
노동비용이 싸다는 점에서 절대적 우위를 지니고 있는데다 내수시장이 거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점은 해외 투자자들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국 등장, 아시아 경제 최대 화두

일본 경제의 지난 70년대 중국을 자신들의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로 바라보던 동남아시아 각국이 이제는 중국과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이런 움직임의 밑바탕에는 중국으로 전세계의 직접투자가 집중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과 ASEAN 국가들에 흘러들어간 해외자본의 직접투자액 비율이 3 대 7이었으나, 이제는 이 비율이 7 대 3으로 역전됐다.


이런 와중에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중국과 일본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앞으로 10년 안에 이 지역에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하겠다는 중국과 ASEAN 국가들의 포부가 과연 인구 17억, GDP 규모 2조달러의 경제권을 탄생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또한 올해 초 ‘동아시아 공동체’ 창설을 부르짖은 ‘고이즈미 독트린’ 역시 현재로서는 내용이 채워지지 않은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최근 두드러지는 역내 경제협력 움직임을 중국과 일본 사이의 경쟁구도로만 애써 단순화시킬 필요는 없다.
중국과 일본의 종종걸음이 아시아 질서 재편의 한단면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동시에 오늘날 아시아 경제가 놓여 있는 틀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역내교역은 이들 국가의 전체 교역규모에서 30%의 비중을 차지할 만큼 커졌다.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남미자유무역지대 등과 견주어 보더라도 아시아 국가들의 역내 교역비중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따라서 외환위기라는 긴 터널을 힘겹게 통과하고 세계경제라는 좀더 큰 위험과 맞닥뜨린 아시아 경제는 이제 역내, 그리고 각국 내부의 거시경제적 불안정 요소를 줄여나가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오래 전부터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아시아 경제의 모습은 언제나 ‘정체’와 ‘기적’이라는 두 이미지 사이에서 움직여왔다.
아시아 경제를 신비화하는 이런 이미지들은 서구인들의 잣대로 잰 결과인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 경제가 서구인들에게 그들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어왔음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아시아 각국이 외환위기의 상처를 씻고 바쁜 발걸음을 놀리고 있는 지금,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눈길은 과연 어디를 향해야 할까? 2002년 초여름, 은 독자들께 이런 물음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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