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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PL법 강건너 불 구경
[비즈니스] PL법 강건너 불 구경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2.07.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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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센터 문의건수·보험 가입업체 소수에 불과… 하청업체에 부담 떠넘기기 부작용도


모 대기업 계열의 패션업체에 의류를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은 최근 뜻하지 않은 비용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최근 물건 납품 전에 반드시 검침기로 봉제바늘이나 금속잔재가 혹시나 남아 있지 않은지 검사해야 한다는 조항이 하청계약서에 추가된 탓이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일이지만 문제는 검침기 가격이 1천만원을 넘는 고가라는 데 있다.
그러나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검침기를 구입하는 것 이외에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대기업 등 완성품 제조업자들은 제조물책임(PL)법 시행으로 제품 결함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이 커진 만큼 하청업체에 적용하는 안전관리기준 강화는 불가피한 조처라는 입장이다.
자칫 소송에 휘말리는 경우 금전적 배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회사와 브랜드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7월1일 PL법 시행과 함께 상당수 기업이 비슷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업들이 많지 않다.



제조업체보다 유통업체 관심 많아


PL법은 제품의 결함으로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을 경우, 제조업체가 고의나 과실로 유발한 사고가 아니더라도 배상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손해배상을 둘러싼 분쟁에서 소비자가 한층 유리해진 것이다.
기업을 대상으로 한 PL법 소송이 줄을 이을 것이라는 우려가 컸던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는 불필요한 소송을 막고, 제조업자와 소비자간 분쟁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업종별로 민간 PL센터를 설치하도록 했다.
현재 한국자동차공업협회, 한국전자산업진흥회,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한국식품공업협회 등 11개 단체가 민간 PL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각 PL센터는 법률전문가와 기술전문가, 소비자 단체 대표가 참여하는 분쟁조정기구를 두고 있다.


5월28일 가장 먼저 문을 연 한국전자산업진흥회 산하 전자제품 PL상담센터에는 6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전자업종은 소비자들이 직접 사용하는 제품을 만드는 특성 때문에 PL법에 가장 민감한 곳 중 하나다.
그러나 상담창구 직원은 “개소 후 상담 건수는 20건 정도에 불과하다”며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PL법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제조업체보다는 유통업자와 소비자의 문의가 더 많다고 한다.
유통업자는 주로 상품을 팔았을 때 어디까지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지, 면책 사유는 어떤 것이 있는지 물었고, 소비자들은 품질 불량도 PL법의 적용을 받는지 궁금해했다.
제조업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PL법 대응책은 보험에 가입하는 것이다.
진흥회는 단체 PL보험 가입을 추진하기 위해 310개 회원사를 대상으로 7월3일부터 PL법 준비실태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손해보험사들과 접촉에 들어갈 계획이다.
박천주 전자제품 PL상담센터 과장은 “PL법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10인 이상 사업장은 최소 1명 정도는 전담자를 두어야 한다”며 “한번 PL소송에 걸리면 기업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PL법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곳은 중소기업이다.
대기업들은 이미 PL법이 공포된 2000년 1월부터 전담 부서를 만들고, 직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착실한 준비를 해왔다.
수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우리나라 총수출의 69%가 PL법 시행국들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수출상품이 오래 전부터 PL법의 적용을 받아온 것이다.
김형원 재정경제부 사무관은 “수출품을 만드는 중소업체들은 해외에서 PL법을 경험한 만큼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PL법에 대한 대응책을 제대로 마련해놓지 못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는 이러한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단체 PL보험 가입 신청을 받고 있다.
중소기협중앙회 PL사업팀 관계자는 “지금까지 대략 300개 업체가 단체 보험에 가입했다”며 “지난 5월부터 관련 문의가 폭증하고 있지만 실제로 가입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중앙회의 단체 PL보험에 가입하면 개별 가입 때보다 20~30% 정도 보험료를 절약할 수 있다.


PL법 시행 이후 하청업체에 PL보험 가입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PL법은 제조물의 결함으로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을 경우 완성품 제조업자나 부품 제조업자 어느 쪽에든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일단 배상 판정을 받게 되면 피소된 업체가 우선 소비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후 완성품 제조업자와 부품 제조업자는 서로간의 과실 비율을 따져 구상권을 행사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비교적 친숙한 완성품 제조업자를 대상으로 PL소송은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완성품 제조업자가 피해자의 손해를 우선 배상한 후 과실 비율에 따라 부품 제조업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해야 하지만 해당 업체가 배상 능력이 없을 경우 구상권은 무의미해진다.



기업들, 관망 분위기 지배적


또 책임 소재를 떠나 PL소송에 걸린 것만으로도 회사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 피해는 부품 제조업자보다는 완성품 제조업자에게 더 클 수밖에 없다.
때문에 많은 대기업들이 협력업체나 하청업체에 대한 안전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배상책임을 중소업체에 떠넘기는 부당한 압력이 개입하기도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도 ▶원사업자의 PL보험료 등을 수급사업자의 하도급대금에서 부당하게 공제해 감액하는 행위 ▶원사업자가 제품의 안전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검사방법을 기존의 발췌검사에서 전수검사로 변경하면서 발생하는 비용 증가분을 일방적으로 하도급대금에서 감액하는 행위 ▶제품결함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이 불분명함에도 수급사업자에게 일방적으로 부담금을 할당해 하도급대금에서 감액하는 행위 ▶PL을 이유로 원사업자가 일방적으로 검사기준을 정해 부당하게 반품 또는 수령을 거부하는 행위 등을 중점 단속하고 있다.


손해보험사들은 PL법 시행에 맞춰 ‘생산물배상책임보험’(PL보험) 상품을 내놓았다.
그동안 일부 국내 소비제품과 무역 조건상 보험가입이 필요한 수출제품만 제조물로 인한 사고피해를 배상하기 위해 영업배상책임보험의 생산물 특약에 가입해 왔다.
PL법이 시행되면 배상 범위가 넓어지고, 기업의 패소 가능성이 높아진 만큼 PL보험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삼성화재 관계자는 “아직 법이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지켜봐야겠지만, 아직까지는 문의만 많을 뿐 실제 가입은 저조하다”며 “전체 대상업체 중 3%만이 PL보험에 가입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PL보험 가입이 의무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시장 규모가 예상만큼 커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PL보험 시장이 커지더라도 보험료의 대부분이 재보험 가입에 다시 사용되기 때문에 곧바로 손해보험사의 수익 증가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PL법의 위력은 아직도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업들 사이에는 관망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어느 보험업계 관계자의 말처럼 대표적 사례가 나온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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