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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해외도피 자금, 뜨거운 감자
[독일] 해외도피 자금, 뜨거운 감자
  • 최우성 기자
  • 승인 2002.08.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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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말 총선을 앞둔 독일에서 새롭게 등장한 쟁점 하나가 선거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쟁점이란 과도한 소득세를 피해 해외로 나간 독일 부자들의 돈꾸러미를 다시 독일로 가져오는 문제다.
이들의 자금은 높은 실업률에 내수시장마저 얼어붙어 경기회복 전망이 불투명한 독일 경제에 구원투수 역할을 할 수 있다.
재정적자 규모가 이미 유럽 통화통합의 기초조건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3% 수준에 근접해 재정 측면에서 더이상 이렇다 할 정책수단을 손에 쥐고 있지 못한 독일 정부는 이들의 자금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꾸준히 우위를 보이고 있는 야당(기민·기사당 연합)이나 막판 뒤집기를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사민당) 모두 이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독일에 등을 돌린 부자들이 돈꾸러미를 다시 독일로 가져오게 하는 구체적 방안을 찾는 게 쉽지 않다.
선거 후 조세범들을 특별사면하자는 주장이 눈길을 끄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소득세 납부를 피하기 위해 세계 도처로 돈을 빼돌린 조세범들을 특별사면해 그 돈을 다시 독일로 끌어들이자는 것이다.
야당인 기민·기사당 연합은 물론 자유당 주변에서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이 주장은 이제 선거전의 전면으로 등장하는 분위기다.
특히 부유한 자영업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유당은 이런 내용을 공식적 선거강령에까지 집어넣어 분위기를 한층 돋우는 중이다.



출 규모 1천조원, 경제회생 큰 힘 기대


현재 독일 정부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해외 불법유출 자금규모는 대략 1조유로(1천조원)에 이른다.
대부분은 유럽연합(EU)에 가맹하지 않은 스위스나 인근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등의 비밀계좌에 숨겨져 있다.
대표적 ‘조세피난처’인 케이먼아일랜드, 버뮤다 등도 독일 부자들의 손길을 피해가지 않았다.


이들 불법유출 자금에 대해 선거가 끝난 후 특별사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조처를 시행할 경우 상당한 규모의 자금이 독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다만 특별사면에는 한가지 단서가 붙는다.
바로 독일 경제를 위해 ‘좋은 일’에 쓰여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예컨대 동독지역 재건이나 일자리 창출 등은 특별사면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단골메뉴다.


인근 국가들이 비슷한 조처를 통해 톡톡히 효과를 거뒀다는 사실도 각 정당의 기대수준을 높여준다.
지난 1991년 스페인 정부는 해외 도처에 숨어 있던 불법 유출자금 50억유로를 국내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6년 동안 국채에 투자해야 한다는 게 전제조건이었다.
게다가 채권금리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올해 초 이탈리아 정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불법 유출자금 총액의 2.5%를 강제 징수하거나, 혹은 국채를 사들여야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 결과 이탈리아 정부당국이 파악하고 있던 불법 유출자금의 10분의 1 규모인 500억유로가 이탈리아로 되돌아갔다.


인근 오스트리아의 예는 더욱 눈길을 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일회성 특별사면에 그치지 않고, 금융자산에 대한 조세정책 틀을 바꾸는 계기로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93년부터 높은 소득세율을 무차별로 적용하기보다는 금융소득의 25%를 금융기관이 일괄 징수해 세무당국 계좌로 자동이체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소득세제의 근간을 흔들지 않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소득세율을 낮춰 해외유출 인센티브를 줄인 셈이다.
이후 오스트리아 세수는 두배가량 늘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요 정당들이 발빠른 행보를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 주장에 대한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조세정책의 정당성을 스스로 짓밟는 조처라는 게 가장 대표적 반대논리다.
꼬박꼬박 세금을 납부한 일반 납세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거론하는 목소리도 높은 편이다.


지난 90년 통일과정에서 조세사범에 대해 한차례 특별사면을 한 바 있다는 사실도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당시 약 7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혜택을 입었고, 추가 조세수입도 11억유로에 달했다.
이 경우는 독일통일이라는 특수상황임을 내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12년 만에 특별사면 형태로 또 한차례 조세범들에게 혜택을 줄 경우, 조세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라는 주장이 아직은 먹혀들고 있는 셈이다.


이미 유럽 단일통화가 마련된 마당에 역외로 자금이 유출되는 것을 차단할 방안을 유럽연합 차원에서 공동으로 마련하는 게 더 시급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예컨대 유럽연합 차원에서 금융기관과 개별 가맹국내 세무당국 사이의 협조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장 수십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부자들에게 최소한의 특혜를 주는 게 옳은 것이냐, 아니면 조세정책의 근간을 유지하는 게 옳은 것이냐? 선거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수록 이 문제를 둘러싼 공방은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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