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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다음기획, 음반계 돌풍
[비즈니스] 다음기획, 음반계 돌풍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2.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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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줄어드는데 저 혼자 쑥쑥 자라는 기업이 있다.
그런 기업은 어느 시장에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소위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돈 흐름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윤도현밴드, 강산에, 정태춘·박은옥이 소속된 기획사 ‘다음기획’이 그러한 성공 사례다.
음반시장은 월드컵 개최와 음반계 ‘큰 손들’의 구속으로 지난해보다 30% 이상 줄어들 전망이지만, 다음기획의 매출은 지난해보다 30~40% 늘어날 전망이다.
올해 전체로 30억원 매출에 9억원의 순이익이 기대된다고 한다.
윤도현밴드의 선전 덕분이다.


윤도현밴드는 요새 제2의 ‘서태지와 아이들’로 떠오르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인기몰이는 록밴드로는 이례적으로 공연, 음반뿐 아니라 방송, CF를 총망라한다.


4월에 나온 윤도현 라이브 2집은 35만장이 팔려 라이브앨범 사상 최고 판매기록을 갱신했다.
이들은 KBS '윤도현의 러브레터'와 리얼시트콤 '청춘'에 출연할 뿐 아니라 MBC FM '2시의 데이트'의 고정 진행자를 맡고 있고 SK텔레콤, 삼성SDI, 패션브랜드 ‘마루’, LG카드, 인켈의 방송광고에 출연하고 있다.
현대 펜택&큐리텔, 농심 수타면과도 광고 모델로 계약한 상태다.


이쯤 되면 이들을 무명 때부터 키운 기획사에선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릴 법도 하다.
기존 음반업계 관행으로 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음기획 경영진은 숫자에는 영 약한 모양이다.
회사 대표는 올해 예상 매출이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다.
실장은 윤도현밴드가 올해 얼마를 벌어들였는지 모른다.


이들은 숫자에 약하다기보다는 초연하다.
이익금도 기획사보다는 가수한테 더 많이 배분한다.
윤도현밴드는 방송, 음반, 공연 등 음악활동 수익의 65%, CF 출연 등 비음악적 활동 수익의 80%를 받아간다.
‘노예계약’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익금 배분에 짠 다른 대형기획사들과는 확연히 비교된다.



열린 마인드로 시장 병폐 제거 앞장


윤도현밴드의 매니저를 겸하고 있는 류상기 실장은 “얼마를 버느냐보다는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김영준 대표는 인터뷰 자리에서 다음기획보다는 음반산업 개선안을 설명하는 데 더 열을 올린다.
알고 보니 이들 모두 ‘문화운동권’ 출신이다.


김 대표와 류 실장은 민중문화운동연합에서 첫 인연을 맺었다.
그뒤 김영준 대표는 가수 정태춘·박은옥씨 매니저로, 류상기 실장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기획실을 차리면서 갈라졌다.
류 실장이 노찾사 기획과 큰빛 기획을 합쳐 다음기획을 설립한 뒤, 이들은 다시 한지붕 아래 뭉쳤다.


그러나 노찾사는 활동이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었다.
뭔가 대안이 필요했다.
류 실장은 이렇게 회상한다.
“노찾사 스타일의 합창음악보다는 록음악이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데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때만 해도 촌냄새 풀풀 나는 윤도현을 발굴했죠.”

그때 다음기획 오디션에서 떨어진 이적은 그 직후 앨범 40만장을 파는 히트가수가 됐지만, 윤도현밴드를 뽑은 다음기획은 배고픈 시절이 오래 지속됐다.
다음기획은 노찾사와 윤도현밴드 멤버들한테 월급 80만원을 주기 위해 사채까지 끌어와야 했다.
활동이 줄어든 노찾사가 해산하면서 급여 부담은 줄었지만 이런 생활은 윤도현밴드 3집 발매까지 이어졌다.


요즘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기획사들처럼 돈으로 홍보활동을 벌일 여력은 당연히 없었다.
다음기획은 대신 대학교 공연장과 대학 언론을 찾아갔다.
다른 가수들이 한두곡 부를 때 윤도현밴드는 30~40분 동안 노래했다.
정태춘·박은옥도 다르지 않았다.
‘운동권’ 가수들의 기획사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방송사 PD들도 다음기획엔 촌지를 기대하지 않았다.
이번 검찰 수사에서 비리에 연루된 PD 중에선 ‘사심 없이’ 이들을 도와준 사람도 있단다.
류 실장은 “그때 라이브만 고집한 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윤도현밴드의 기반을 만들어줬다”고 말한다.


촌지 한푼 없이 온전히 실력으로만 성공한 윤도현밴드의 존재는 방송-연예계 비리로 얼룩지고 활력을 잃은 한국 음악시장에 새로운 희망을 일으키지 않을까? 무리하게 홍보비를 쏟아붓지 않고도 라이브 공연 실력을 바탕으로 스타가 되는 제2, 제3의 윤도현밴드가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다음기획의 두 경영자는 고개를 젓는다.
김영준 대표는 “100년 만에 한번 찾아오는 운대가 맞은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연히 한국 축구대표팀 서포터 ‘붉은 악마’의 응원가를 불렀는데, 월드컵 열기를 타고 그것이 대중적 인기를 몰고왔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계에 심재명, 유인택같이 열린 마인드로 영화산업 전체를 고민한 제작자가 있어 영화가 산업적 기반을 갖게 됐듯이, 대중음악계에도 그런 마인드를 가진 기획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류상기 실장은 정책 담당자의 마인드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윤도현밴드가 이번에 방송협회 가수상을 받았다고 해서 청와대에서 식사에 초청했어요. 그런데 도현이만 가서 '오 필승 코리아'를 불러달라는 거예요. 공연 시설도 없이, 밴드도 없이 말입니다.
음악산업 정책을 만드는 윗분들이 그렇게 뮤지션을 딴따라 취급하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니 대중음악판이 건달문화가 되는 겁니다.


8월초에 다음기획은 드럭, 미디어스톰 등 13개 대중음악 관련단체들과 함께 ‘음반기획제작자연대’를 구성하고 정책부터 유통시스템까지 한국 음반산업의 병폐를 뜯어고치겠다고 나섰다.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사람은 이들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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