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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북일 정상회담 선물 보따리는?
[초점] 북일 정상회담 선물 보따리는?
  • 김호준 기자
  • 승인 2002.09.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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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크가 높다고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 북한을 방문하기로 결정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 대해 일본의 한 고위 관리가 한 말이다.
해방 이후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이라는 갑작스러운 소식이 전해진 지난 8월30일 이후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고위험 고수익’의 정치적 결단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언론을 통해 사전합의 사항이 알려진 뒤로는 “사전준비가 이미 끝난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북일 정상회담 추진은 1년6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는 9월12일 <아사히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지난해 1월27일 북한 외무성 강석주 부상이 북일 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의해왔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북한은 일본인 납치 문제를 포함한 현안을 일괄 타결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고, 식민지배 배상 문제에 대해서도 그동안 주장해온 배상 청구권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표명했다”고 말했다.
북한과 일본은 그뒤 30여차례 이상 수교교섭 재개를 위한 물밑 접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에 시작된 북일 수교교섭은 과거사 청산 문제와 일본인 납치 문제로 평행선을 그어왔다.
그동안 북한은 일관되게 과거사에 대한 ‘사죄 및 보상’을 요구한 반면, 일본은 경제협력 방식을 주장해왔다.
또한 일본인 납치 의혹에 대해서는 북한은 “일본이 과거청산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극”이라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납치 문제 해결 없이는 국교 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당국자간 사전협의에서 양국은 ‘과거청산’ 문제를 65년 ‘한일간 청구권 협상’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 언론은 이미 북한이 83년 영국 유학중 실종됐던 아리모토 게이코와 숨진 사람 2명의 안부를 확인해줬으며, 정상회담에서 추가 확인이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밖에도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95년 무라야마 담화문의 수준에서 사과하고,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실험을 2003년 이후에도 동결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방 이후 최초 ‘북일 정상회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9월17일 하루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는 3시간 동안 정상회담을 벌일 예정이다.
이번 회담에서 양국은 수교교섭 재개를 선언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북한과 일본의 외교당국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진행중인 사전협의에서 2000년 10월 이후 중단된 국교 정상화 교섭 재개 방침에 합의했다”고 9월7일자로 보도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파격적 면모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정치적 부담이 큰 북일 정상회담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이미 실무선에서 상당한 수준까지 작품을 만들어놓았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역대 총리 및 자민당 총재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일본 국민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납치 의혹’ 문제에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표명한 바 있다.


북일 수교교섭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북한이 원칙적 수준에서 일본쪽의 요구를 수용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북한이 그동안 북일 수교교섭에서 보여온 완고한 태도를 고려할 때 북한쪽에서 획기적 방향전환을 한 것이다.
더불어 북한은 북·일 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이 발표된 8월30일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도 적극적 자세를 보여 경의선, 동해선의 연내 연결과 개성공단 건설공사의 연내 착공 문제 등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남북간 주요 경제협력 사업들의 추진 일정 및 방안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북한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북한의 절박한 경제사정과 달라진 국제환경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북한실 남우석 연구원은 “북한은 지난해부터 미국, 일본, 한국 등 주요 대북한 원조 국가들과 냉각관계가 지속되면서 식량 등 기초물자 부족현상이 다시 가중되고 있는 상태”라며 “또한 그동안 북한의 주요 외화 획득원이었던 조총련 지원자금, 금강산 관광사업도 여의치 못함에 따라 대금 지불능력이 떨어져 대외무역 여건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지난 7월 물가와 임금의 현실화, 기업의 자율성 강화와 인센티브 제고 등을 골자로 하는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단행했다.
이 조치는 북한 주민의 구매력과 생산의욕을 높였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외부지원과 내부 공급 확대가 안정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이번 조치가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를 불러올 위험성도 있다고 지적한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김연철 교수는 “북한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전향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번 경제개혁 조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지원, 특히 일본의 지원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단기적으로 공급 부족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쌀 지원이 중요하고, 중장기적으로는 경제협력 방식으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북일 양국이 한일간 청구권 협상과 비슷한 수준에서 과거사 청산에 합의한다면 북한은 대략 50억~100억원대의 경제협력 자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지난해 대외교역 규모가 27억달러, 국내총생산(GDP)이 157억달러였던 점을 감안할 때, 이같은 규모의 경협자금 지원이 이뤄질 경우 북한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매우 클 것이다.



납치·과거청산 사전협의 알려줘 낙관도


물론 자금이 한꺼번에 지원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 한일간 국교 정상화 때는 5억달러(유상 2억달러, 무상 3억달러)의 ‘청구권 자금’이 10년간에 걸쳐 지원됐다.
북한은 사용의 제한을 받지 않는 현금 지원을 선호하지만, 일본은 장기간에 걸친 플랜트 수출쪽에 관심을 두고 있다.
LG경제연구원 김석진 북한 담당 책임연구원은 “북일간 경협은 정부개발원조(ODA)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며 “그럴 경우 프로젝트별로 일본 정부가 자금 지원을 일일이 심사할 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의 사업권 부여를 조건으로 붙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또한 북일수교가 성사될 경우 북일 교역관계의 가장 큰 장애요인인 북한의 대일본 채무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북한의 대일본 채무는 약 800억엔 정도로 추정되는데 수교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이 부분에 관심을 보인다면 채무의 상당부분이 해결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일본 기업의 대북한 투자가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서울과 도쿄를 거쳐 워싱턴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대 김연철 교수는 “미국의 조지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일본과의 관계가 북한의 대외정책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도 내각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 하락을 만회하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확대하기 위해 북일 수교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북일 정상회담에서 수교교섭 재개가 합의될 경우 연내에 수교 문제를 마무리할 방침을 굳혔다”며 “이같은 방침은 한국 대통령 선거와 미국의 이라크 공격 등으로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크게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9월12일 보도했다.


하지만 북일 교섭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기에는 민감한 문제가 너무 많으며 핵사찰, 미사일 등 정치, 군사적 문제에 대해서 일본이 미국의 역할을 대신 하기에는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LG경제연구원 김석진 책임연구원은 “북일 관계는 결국 북미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북한이 일본말고도 아시아개발은행(ADB),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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