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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황제경영 종식을 위한 제언
[서평] 황제경영 종식을 위한 제언
  • 백우진 기자
  • 승인 2002.10.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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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리게 된 사태, 경제위기의 ‘주범’ 가운데 하나로 재벌체제가 지목됐다.
IMF도 재벌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벌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힘이 약해졌다.
한국 경제 사상 처음으로 재벌체제를 개혁할 계기가 제공됐다.
김대중 정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재벌개혁을 추진했다.


매각, 청산 등 방법으로 많은 부실기업이 정리됐다.
대우를 비롯해 30대 그룹에 속했던 절반 이상의 재벌이 정리되면서 대마불사의 그릇된 신화가 사라졌다.
아울러 소수주주권이 강화됐고 회계투명성이 높아졌다.
외국자본이 유입돼 주식시장을 통한 감시 및 견제 또한 강화됐다.
재벌 계열사간 부당 내부거래도 예전보다 덜해졌다.


저자는 “하지만 개혁 주체는 올바른 개혁정신과 비전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개혁역량을 이리저리 흩어뜨리고 말았다”며 포문을 연다.
예를 들어 빅딜은 과잉설비와 인력, 그리고 부채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을 뿐더러 반도체는 오히려 부실을 확대 재생산했다는 것이다.



장기화될 재벌개혁 논리적 진지 구축


또한 개혁은 시간이 흐르면서 흐지부지됐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제도를 바꾼 하드웨어적인 개혁이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작동하도록 한다’는 정부의 장담이 유야무야됐다는 얘기다.
저자는 사외이사제도는 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적대적 인수합병(M&A)에 의한 자본시장쪽 견제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분석한다.
또 집중투표제는 법령상으로는 도입됐지만 실질적으로는 배제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마당에 재벌개혁이라는 이슈를 다시 꺼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그람시의 ‘진지전’이라는 개념을 빌린다.
“재벌개혁이 소강상태의 진지전에 접어든 지금 시점이 현재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미래의 방향을 차분히 모색하기에는 오히려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 말하자면 이 책은 장기화될 재벌개혁 문제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인 진지’다.


그는 긍정적이다.
“재벌개혁은 결코 재벌 죽이기나 재벌 혼내주기가 아니라 재벌 거듭나기를 도와주는 사랑의 윈윈(win-win) 게임이다.
이 게임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모두가 즐겁게 동참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현실적이다.
저자는 우선 과도한 사업다각화에 대한 경계를 독립경영과 등치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삼성의 반도체사업이나 현대의 조선업은 기존 계열사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예를 든다.
이와 함께 종업원지주제에서 한걸음 더 나간 노동자 자주관리론과 외국자본 배격론도 사양한다.


일부 재벌옹호론자와 재벌개혁론자가 공히 저지르는 오류에도 빠지지 않는다.
“무능하고 부패한 총수를 경영 일선에서 퇴진시켜야 기업과 국민경제가 발전할 수 있음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이 소유-경영 분리론이 소유자는 경영자가 될 수 없다는 식으로 소박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창업기업의 경우엔 소유와 경영이 일치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저자는 재벌개혁은 황제경영을 혁파하기 위한 소유·지배구조 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본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국가재산과 왕실재산의 혼동, 즉 공과 사의 혼동이 발생하며 왕의 지위는 통치능력과 무관하게 혈연에 의해 계승된다.
재벌체제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기업 재산이 총수의 호주머니 장난감 정도로 취급되는 공과 사의 혼동이 발생하며, 총수의 지위는 경영능력과 무관하게 자식에게 계승된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질서에 부적합한 전근대적 유제다.



재벌 혁파는 소유·지배구조 개혁


저자가 지난해 초 한 일간지에 기고한 ‘삼성의 거듭남을 위하여’ 가운데 몇가지는 아직도 현안으로 남아 있다.
“삼성자동차 부채는 삼성측의 처음 약속대로 이 회장의 사재로 말끔히 처리해야 한다.
이재용씨도 함부로 경영에 나서서는 안 된다.
경영능력의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2, 3세 세습경영의 폐해는 한번으로 족하다.
이재용씨를 다른 사원들과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시켜 그 능력을 검증하지 않을 바에는 경영과 거리를 두게 하는 게 옳다.
” 다만 황제경영을 혁파하기 위해서 소유·지배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어조를 높인 뒤, 정작 구체적 방안에서는 재벌가의 결단에 호소한 대목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방송대 경제학과 교수인 저자는 IMF 이후 재벌문제와 관련한 TV 토론회에 활발히 참여하고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했다.
“IMF 사태와 재벌부도가 밀접하게 관련된 탓에 재벌 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그래서 아직 공부중인 필자까지 이런저런 자리에 징발되었고 각계각층의 인물들과 접할 기회를 가졌다.
” 한 라디오방송에서는 “재벌체제에서 전문경영인은 있을 수 없고, ‘내시 경영인’만 있을 뿐”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이 책은 모두 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은 1995년부터 올해까지 따로따로 쓰였다.
각 장에는 그와 관련된 신문·잡지 기고가 두어편씩 딸려 있다.
7장은 재벌기업의 노사관계를, 8장은 재벌 가운데 유일하게 노조가 없는 삼성의 노사관계를 다뤘다.
재벌체제의 발전과정, 특히 현대의 성장과 위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3장과 4장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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