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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은퇴자 탈출구 찾아 피지로 피지로
[특집] 은퇴자 탈출구 찾아 피지로 피지로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2.11.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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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한국에서보다 풍요로운 노후를 즐길 수 있는 나라를 찾아 떠나고 싶어하는 은퇴자들이 많아진 것이다.
자식 곁을 떠나 낯선 나라로 간다는 것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던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러한 관심이 실제 이민 행렬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선진국의 경우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조만간 은퇴이민이 본격화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 은퇴자협회는 지난해 200만명의 미국인이 생활비가 더 싸고 자연환경이 더 좋은 곳을 골라 해외로 나간 것으로 추산한다.
에콰도르, 파나마, 크로아티아, 산토도밍고 등이 이들의 대표적 은퇴 이민지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 바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다.
일부 언론매체에 최고의 은퇴이민 후보지로 소개된 것을 계기로 피지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민 알선 업체에선 1억원만 있으면 피지에서 넉넉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며 회원모집에 적극적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은퇴이민이 우리 현실에선 시기상조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과연 피지 열풍의 의미는 무엇일까?

10월18일 서울 을지로입구 하나은행 대강당에는 피지 은퇴이민 설명회가 열렸다.
외교통상부에 신고된 67개 해외이주알선 업체 중 유일하게 피지이민을 취급하는 남미이주공사 www.2min.com에서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150여명의 사람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강지현 남미이주공사 실장은 “이렇게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다”며 “설명회가 끝난 뒤에도 문의전화가 폭주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를 정도”라고 말했다.



피지 은퇴이민 설명회 ‘북적북적’


이 업체는 1997년부터 피지로 이민을 보내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30~40대 젊은층을 주요고객으로 삼아왔다.
피지를 거치면 같은 영연방에 속하는 호주나 캐나다로 나가기 쉬울 뿐 만아니라,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어 저가의 교육이민에도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캐나다 등 인기 국가에 밀려 이민 수요는 그리 많지 않았다.
회사 관계자들은 최근 ‘은퇴이민’에 포커스를 맞추고 나서 고객이 크게 늘었다고 말한다.


강영호 남미이주공사 지사장은 “정년퇴직을 하면 보통 2억~3억원을 손에 쥐게 되는데, 이걸로는 여유 있는 노후를 보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그러나 피지에서는 1억원만 가져가도 풍족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피지는 세계적 휴양지로 물과 공기가 깨끗하고 골프장, 리조트 등 각종 휴양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다른 곳보다 은퇴자의 이민이 쉽다는 것도 매력이다.


강지현 남미이주공사 실장은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 선진국은 생활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은퇴자들이 이주자격을 얻기도 쉽지 않다”며 “피지는 45살 이상인 경우 10만피지달러(6600만원)를 현지 은행에 예치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남미이주공사는 지원자들을 모집해 11월9일부터 5박7일 일정으로 현지 답사여행에도 나설 계획이다.


영사업무를 함께 처리하고 있는 피지관광청 한국사무실 www.bulafiji.or.kr에도 이민 관련 문의가 부쩍 늘었다.
피지관광청 한국사무실 이가정씨는 “전에는 문의전화가 드물었는데 최근에는 하루평균 5~6통씩 걸려온다”며 “피지 실정을 궁금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한번쯤 현지에 가 교민들을 직접 만나보도록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신원조회를 기준으로 파악한 올해 이주자 수는 모두 100여명이다.
그중 50살 이상이 15명으로 아직은 젊은층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러나 체류 연장시에도 신원조회를 다시 하기 때문에 이를 정확한 통계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현지사업 불가능, 대부분 본국서 송금


자영업을 하던 홍아무개(61)씨는 요즘 피지 관련 정보를 빼놓지 않고 챙긴다.
그는 “피지 은퇴이민에 대해 듣고 내가 찾던 게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부터 계속 이것저것 새로운 사업을 벌이다 보니 노후자금을 얼마 모아놓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중상류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려면 적어도 월 300만원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마냥 손을 벌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그동안 고달프게 일해왔는데 노년에도 빠듯하게 살아야 한다니 답답하다”며 “피지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26만원 정도면 1년 내내 마음 놓고 골프를 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대기업 임원으로 일하다 올 봄 명예퇴직 한 이아무개(58)씨도 피지에 관심이 많다.
이씨는 아직은 쉬기보다 뭔가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관리직을 오래한 탓에 새로 직장을 갖기가 쉽지 않다”며 “비용이 많이 들어 창업도 망설여진다”고 말했다.
피지에 가면 비교적 적은 돈으로도 가게를 운영하면서 여유 있게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다.
그는 경쟁이 덜한 곳에서 큰 욕심 없이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씨는 인터넷으로 피지의 이민법을 살펴보고 나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민 자격과 절차에 대한 혼란 때문이다.
은퇴이민으로 들어가도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지금 갖고 있는 돈으로 정말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씨는 “나머지 일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라며 “좀더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피지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다른 이아무개(50)씨는 사업관계로 한국에 잠시 나와 있다.
그는 “은퇴이민 자격으로 들어가면 원칙적으로 사업을 할 수 없다”며 “현지인과 동업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피지 정보 중에 과장된 내용도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생활비가 싸고 자연환경이 깨끗해 은퇴자들이 살기에는 좋은 곳”이라며 “그러나 골프, 낚시 등 스포츠를 빼고는 소일거리가 마땅치 않아 영어에 서툴거나 운전을 못할 경우 답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피지 정부는 은퇴자를 반긴다.
돈을 쓰러 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000년 이민법을 개정해 연령제한을 60살에서 45살로 낮췄다.
45살 이상은 10만피지달러(6600만원)를 피지중앙은행에 예치하거나, 10만피지달러 상당의 주택 등 현지 자산을 구입하면 누구나 3년 기한의 거주사증을 받을 수 있다.
은행 예치금을 찾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잔액이 3만피지달러(1980만원) 이하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
피지에는 공식적 이민제도가 없다.
일단 거주사증으로 입국해 5년이 지나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다.


주피지 한국대사관 전종윤 영사는 “10만피지달러 예치금은 누구나 쉽게 마련할 수 있다”며 “그러나 거주사증을 받으려면 4인 가족 이하 기준으로 매년 3만피지달러(1980만원)를 추가로 예치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말한다.
매년 1980만원을 국내에서 송금받으려면 예금 금리를 5%라고 가정할 때 최소한 3억9600만원을 은행에 넣어두고 있어야 한다.
매달 165만원의 연금을 받을 수 있어도 된다.
결코 적지 않은 부담이다.



이민국보다 장기 휴양지로 적합할 수도


전 영사는 “피지에서 돈을 벌어 생활비를 조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인구가 적어 사업을 해도 많은 이익을 내기 어렵다.
은행 예치금에 붙는 이자도 기대할 수 없다.
은행 이자율이 보통 0.05% 수준이다.
돈을 맡겨놓으면 오히려 보관료를 더 많이 떼어간다.
피지에서 안락한 노후를 즐기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본국에 상당 규모의 자산이나 연금 수입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년퇴직 후 손에 쥔 2억~3억원을 모두 털어 무작정 떠나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생활비도 꼭 싼 것만은 아니다.
전 영사는 “한달에 생활비로 대개 1천피지달러(66만원)쯤 쓴다”며 “그러나 풍족하게 생활하려면 2천피지달러(132만원)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집세, 전화요금, 전기세 등 필수항목을 뺀 나머지는 무척 싸다.
특히 골프 등 여가활동에 들어가는 비용은 놀랄 만큼 저렴하다.
전 영사는 “이곳 호텔이나 리조트에 가보면 몇달씩 장기 투숙해 쉬어가는 유럽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며 “가만히 있으면 금방 지루해하는 한국인들과는 다른 모습”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퇴이민이 아직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대한은퇴자협회 주명룡 회장은 “우리나라의 60살 이상 노인의 80%가 경제적 이유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은퇴자들이 외국에 나가 살 수 있는 마인드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것도 문제다.
주 회장은 “아무런 준비 없이 피지라는 작은 섬나라에 들어갈 경우 금방 한계를 느끼게 될 것”이라면 “은퇴이민보다는 삶의 여유를 찾기 위한 장기 휴양지로 더 적합할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피지에 살고 있는 은퇴이민자 중에도 현지에 완전히 정착하기보다는 한국과 피지를 오가며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은퇴자들이 생활비가 싸고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적극적으로 떠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다.
미국에서는 베이비붐 세대들이 은퇴기에 들어선 최근 몇년 사이에 그런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막 50~60살에 접어든 세대는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은 ‘신식 노인’들이다.
삶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그 이전 세대와는 많이 다르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을 더 중요시한다.
이들은 마냥 참기보다는 좀더 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하기도 한다.
주 회장은 “피지 열풍이 우연일 수는 있지만 많은 노인들이 은퇴이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도 다양한 ‘은퇴 이후’ 프로그램이 필요해졌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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