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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금펀드 SRI로 일보 전진
[기획] 연금펀드 SRI로 일보 전진
  • 특별취재팀 최우성 기자
  • 승인 2002.11.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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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7월3일을 영원히 기억하라. 이날은 바로 영국 SRI 역사에서 한획을 그은 날이다.
” 세계 각국의 금융시장에서 불고 있는 SRI 바람을 최근 출간된 'SRI:글로벌 혁명'이란 책에 고스란히 담아낸 영국 출신의 펀드매니저 러셀 스팍스는 이렇게 힘주어 말한다.
영국 사회투자포럼(UKSIF)의 SRI 프로젝트팀장을 맡고 있는 헬렌 바네스도 이런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이날을 계기로 영국에서 SRI는 분명히 한단계 업그레이드됐다.
” 모두들 이 날이 영국에서 SRI 얘기를 꺼내는 첫단추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도대체 이날 영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비밀은 꼬박 1년 전인 1999년 7월1일 의회를 통과한 연금법(Pensions Act) 개정안이 이날부터 마침내 효력을 갖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잠시 세월을 거슬러 떠나보자. 95년 제정된 영국 연금법(제35조)에는 모든 민간연금펀드 운용 주체가 이른바 ‘투자원칙선언’(SIP)을 명시적으로 밝혀야 한다는 규정이 담겨 있었다.
SIP란 말하자면 특정펀드를 운용하는 대원칙이나 철학이 담긴 기본 밑그림쯤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런데 99년 개정안에 이르러 ‘자그마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SIP가 좀더 구체적 내용으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이제 민간연금펀드를 운용하는 모든 주체들은 ‘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때 사회·환경·경제의 세 요소를 함께 고려할 뿐 아니라, 주주로서의 권리를 성실하게 이행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했다.
이를 두고 스팍스는 “단 50개에 불과한 단어가 영국 금융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다”고까지 말한다.


SRI와 관련한 첫 제도화 사례로 받아들여지는 이 개정안이 통과되기까지 모든게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영국 사회투자포럼의 헬렌 바네스는 특히 “영국 연금펀드협회(NAPF)의 반발이 무척 컸다”고 회고했다.
NAPF는 기업연금, 공무원연금 등 영국 내 700만 종업원과 400만 퇴직자를 아우르는 거대조직이다.
이 협회 산하의 펀드자산만 합쳐도 7000억 파운드에 이른다.
당시 이들 연금펀드와 연결되어 있던 펀드매니저들은 SRI 관련 규정이 자칫 수익성에 방해가 될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스팍스의 말을 빌리면 “여전히 낡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셈이다.
하지만 의회내 각 정당을 아우르는 ‘SRI 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비로소 논의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사회·환경·경제 고려하고, 주주 권리 성실히 이행”


물론 이 규정은 어디까지나 공시(disclosure)의 의무를 나타낼 뿐, 실행의 의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연금펀드를 반드시 SRI 원칙에 따라 투자해야 한다는 강제규정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자그마한 변화가 가져온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주주책임연구센터(IRRC) 런던본부의 데이비드 단도 대표는 “이 규정으로 인해 그간 일부 소수집단의 움직임으로 비춰지던 SRI가 영국 금융의 메인스트림 대열에 끼어들 수 있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때까지 SRI가 주로 일반투자자나 자선펀드만의 관심거리였다면, 이제 메인스트림 기관 투자자들의 촉수에 좀더 분명하게 걸려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평가가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각종 연금펀드들이 앞을 다퉈 SRI 대열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은 물론 주요 서구국가들에서 연금펀드는 이미 SRI를 떠받치는 든든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2002년 현재 금융시장을 무대로 투자활동에 참여하는 연금펀드의 자산총액은 전세계적으로 대략 15조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99년을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 세계 300대 연금펀드의 자산총액만 5조2천억달러 규모다.
예컨대 영국 시장에서 연금펀드가 차지하는 몫은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35%에 이른다.
만일 이 돈이 단기적 수익성만을 좇는 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회적 위험’을 감안한 지속가능성이라는 잣대에 눈을 뜰 경우, SRI 바람은 더욱 거세질 게 틀림없다.


영국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이런 흐름에 뛰어든 연금펀드로는 230억파운드 규모의 브리티시텔레콤(BT) 기업연금이나 220억파운드 규모의 대학교원연금(USS)을 꼽을 수 있다.
USS의 경우 3500명에 이르는 개인들과 대학교원협회 등이 나서 SRI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연금펀드 가맹자들의 노력이 방향전환에 미온적이던 펀드매니저들의 마음을 돌려 놓은 사례로 꼽히는 탓이다.
지방공무원연금(LAPF)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각 지방정부가 지속가능한 미래 사회의 비전으로 제시한 ‘로컬어젠더21’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방편으로 지방공무원연금은 SRI라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한편, 영국내 연금펀드의 운용실태를 연구하는 프로젝트 ‘저스트펜션’(JustPension)의 롭 캐트리지는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연금펀드로 하여금 SRI 가이드라인을 따르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는 사실의 의미를 단순히 SRI가 메인스트림 영역에서 한자리를 차지했게 됐다는 식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 그는 무게중심을 다른 곳에 두는 편이다.
“서구사회에서 연기금은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메인스트림 투자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상대적으로 장기적 안목에 선 SRI가 부침이 심한 주식시장에서 매우 안정적 수익을 안겨다주는 열쇠라는 것 아닌가?” 예컨대 미국 엔론 사태 와중에 커다란 손실을 입은 ‘플로리다 퇴직연금’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말이다.
그는 “이 사건은 SRI에 담겨진 뜻을 연금펀드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을 경우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단정했다.



엔론 사태 이후 관심 크게 늘어


이 말은 “영국의 뒤를 이어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이 잇달아 유사한 규정을 마련하거나 현재 열띤 논의를 벌이고 있는 것도 SRI가 안정적 수익과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특히 엔론 사태 이후 각국의 퇴직연금펀드가 줄줄이 큰 타격을 입자 유럽의회 차원에서 SRI와 관련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부쩍 발걸음이 빨라진 것도 한번쯤 눈여겨볼 만하다.


다만 ‘저스트펜션’이 자산총액 1700억 파운드 규모의 14개 연금펀드를대상으로 최근 실시한 최근 연구결과는 설령 영국의 공시제도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더라도 SRI의 정착 가능성에 대해 당장 섣불리 큰 기대를 거는 건 무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SRI가 완전히 뿌리내리기까지는 아직도 넘어야 할 벽이 만만치 않음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이 연구작업에 참여한 펀드매니저 던컨 그린은 “특히 규모가 큰 연금펀드일수록 오히려 의결권 행사 등 주주로서 권리를 충실히 행하지 않는 사례가 많다”는 점을 강조했다.
SRI 가이드라인을 따르겠다는 투자원칙을 명시적으로 밝혔다고 하더라도, 막상 투자대상 기업에 대해 주주로서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주주책임연구센터 런던본부 데이비드 단도 대표의 생각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주주로서 기업경영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SRI 바람이 더욱 거세지는 것과 한데 맞물려 있다.
” “아마 무게중심은 투자원칙을 확립하는 것에서 보다 많은 투자를 실제로 실행시키기 위한 정교한 틀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옮겨갈 것이다.
” 던컨 그린의 말에는 이제 SRI 바람이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한 고민과 열정이 묻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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