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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4. 주주권 행사 적극 나서라
관련기사4. 주주권 행사 적극 나서라
  • 이원재 기자
  • 승인 2002.11.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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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25일 오전 9시, 국내 대기업 ㄱ사 주주총회가 시작됐다.
대주주와 경영진은 한 해안 도시에 있는 국내 최대규모의 중화학공장을 사들이면서 화학사업에 진출하겠다는 안을 주요 안건으로 올렸다.
두세 마디로 간단하게 안건 설명을 마친 뒤, 경영진은 이의가 없으면 만장일치로 안건을 통과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기업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신규사업 진출에 관한 의결이 순식간에 주총에서 이뤄지려는 순간이었다.


순간 국민연금·공무원연금·기업연금 등 연기금 주주들의 의결권을 위임받은 대표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매수예정인 공장은 공해물질을 불법 배출한다는 의혹을 받고 해당 도시 환경단체와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폐쇄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이 공장을 사들인다면 당장 회사와 지역주민과의 대립이 불거지면서 우리 회사 브랜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현 경영진의 사업확장 야심 때문에 몇십년을 끌고 가야 할 회사 이미지가 위협받아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 연기금의 주인인 국민들이 중화학공장들이 내뿜는 공해로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기금 주주들은 이번 신규사업 진출 안건에 대해 반대의 뜻을 모았습니다.
”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돼 금융권 투자자들이 연기금쪽 대표자의 손을 들어줬고, 대주주의 뜻과 달리 중화학공장 매입 안건은 부결되고 말았다.



국내에서 사회책임투자(SRI)가 주류 투자기법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국민연금기금을 포함한 연기금이 움직여줘야 한다는 한다는 게 금융권의 공통된 지적이다.
연기금은 투자기간이 매우 장기적이다.
단기적으로 치고 빠지는 투자자와는 달리, 이론적으로는 기업의 사회적 위험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장기투자자라면 당장 한해 두해 재무실적보다는 이 실적이 10년 20년 동안 지속 가능한 것인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환경파괴 등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만한 기업이라면 투자를 피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미 투자하고 있는 기업에서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경영을 하지 못하도록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SRI 정신에 따라 운용하는 게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연기금 주주가 기업의 사회 책임을 강조하면서 회사 이기주의적인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막는다는 위의 가상 시나리오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연기금이 기업에 대해 주인의식을 갖고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경영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주권을 행사해 경영을 견제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아무리 큰 지분을 갖고 있더라도 주주총회 때마다 대주주 안건에 거수기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선언


사실 현재 국내에서 연기금의 주주총회에서의 역할은 극히 미미하다는 게 금융권의 중론이다.
한 대형 연금의 투자담당자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주주총회 안건의 내용파악조차 제대로 못한 채 의결에 참여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기업들이 미리 안건 내용을 철저하게 설명해주지 않기도 하거니와, 우리쪽에서도 개별기업 의사결정에 하나하나 신경을 쓰지 못하는 형편이다.
심지어는 전년 사업실적이 형편없는데 임원 보수한도를 크게 올리는 안건도 회사쪽의 무성의와 주주들의 무관심으로 무사 통과되곤 하는 실정이다.


이런 와중에 규모나 위상 면에서 국내 연기금의 맏형격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연금에서 주주권 행사를 강력하게 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해 눈길을 끌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주주로서의 의결권 행사지침’을 만들어달라는 연구를 의뢰했다.
복지부와 국민연금쪽은 이 연구 결과를 놓고 12월 중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한 뒤, 내년 초쯤 의결권 행사 관련 세부 규정을 확정해 바로 주주권 행사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그동안 투자한 기업들에 대해 산발적으로만 대응하던 국민연금이, 아예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경영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힌 셈이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소식은 전체 연기금, 더 나가면 전체 기관투자가들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 선언으로 파급될 수 있는 큰 사건이라고 SRI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그러나 사실 국민연금의 이런 움직임이 SRI로까지 이어질 조짐은 아직 없다.
보건복지부 조기원 연금재정과장은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에 나서는 가장 큰 목적은 주주중심 경영을 이끌어내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라며 “운용의 사회책임성은 아직 논의한 바 없다”고 말했다.
연기금 역시 단기 수익률을 높이는 데 운용목표를 집중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인 것이다.


국민연금쪽의 이런 움직임에 기업쪽에서는 우려 섞인 시선을 던지고 있다.
재계의 대표격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결국 정부가 기업경영에 개입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반발하고 있다.
전경련 경제조사본부 양세영 팀장은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은 지배구조상 정부의 정책의지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국민연금 의사 결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금운용위원회에 정부와 노동계, 시민단체 인사가 전체 의석의 3분의 2가량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들의 경영권에 대한 직·간접적 영향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우려했다.
연기금 자체의 지배구조가 반기업적 성향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적극적 주주활동이 기업활동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재계 “기업활동 오히려 방해” 반론도


그러나 금융선진국으로 눈을 돌려보면,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물론 당연하게 여겨지고, SRI 원칙을 투자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분위기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
영국 사회투자포럼(SIF)이 2000년 연기금들을 대상으로 SRI 투자원칙 채택 여부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전체 171개 가운데 59%가 SRI 원칙에 따라 투자기업을 고르거나 투자기업 경영에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자산규모로는 전체의 78%에 이르렀다.


그리고 펀드의 48%(자산규모로는 69%)는 펀드매니저에게 환경적, 사회적, 윤리적 문제의 재무적 영향을 투자결정할 때 참고하도록 요구한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단지 전체 펀드의 14%(자산규모로는 4%)만이 환경적, 사회적, 윤리적 관심을 투자결정에 반영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응답했다.
영국 연기금에게 SRI는 이미 낯선 일이 아닌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노후연금 운용에 사회·환경 책임을 고려하는 내용의 법제화를 했고, 다른 EU 국가들과 일본에서도 비슷한 법제화가 논의되고 있다.


이런 해외 움직임을 고려하면, 연기금 기업투자가 사회책임을 고려하는 게 큰 흐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선언으로 국내에서도 연기금 사회책임투자를 위한 기반구조가 조성되기 시작한 셈이다.
주주권 행사의 경우 당장은 재계에서 국민연금의 지배구조를 문제삼아 반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국민연금이 OECD 기준에 맞게 지배구조만 제대로 갖춘다면 기업쪽에서도 끝까지 반대할 명분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가 SRI로 간다면, 국내 기업들의 정서상 다시 한번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국내 연기금 SRI 항해에는, 닻이 올려졌고 방향은 잡혔지만 갈 길은 아직 멀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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