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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3. 사회연대와 시장경쟁의 조화
관련기사3. 사회연대와 시장경쟁의 조화
  • 정태인/ 경제평론가
  • 승인 2002.12.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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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모든 사회경제정책은 재정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보통사람의 삶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그 위에서 공정한 시장경쟁이 이뤄지도록 하자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경쟁에 ‘공정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철학은 이러하다.
‘공교육은 강화되어야 한다.
현재의 공적 의료체계 역시 강화되어야 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는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지방대학과 지방산업은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사회연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서로 돕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시장경쟁은 사회연대를 기반으로 해야 더욱 효과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모든 시장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그러나 여기서 졌다고 해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사회연대란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시장엔 패자부활전이 있어야 한다.


그는 시장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장관은 지난해 노벨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용어설명 참조)의 견해에 가장 가깝다.
실제로 노무현의 경제정책에서 스티글리츠의 냄새를 맡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통령후보 경제정책 TV토론에서 권영길 후보가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책에 나온 말을 잘못 인용하자 이를 바로잡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분배와 성장, 그리고 터널이론


그는 시장의 시행착오가 사람들한테 주는 고통을 주시한다.
‘시장은 자생적 질서이지만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진화한다.
이러한 시행착오 속에서 사람들은 고통을 받기 마련이다.
물론 국가도 잘못을 저지른다.
언제나 시장이 더 나은 결과를 낳는다거나 반대로 국가가 더 낫다는 믿음은 이론적으로도 실제 역사에서도 오류이다.
국가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 정보가 올바로 전달되도록 개입할 의무가 있다.


노무현 당선자가 김대중 정부 초기의 재벌정책을 고수하는 것은 공정한 시장경쟁만이 우리 경제를 한계단 더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11월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IT정책 포럼을 앞두고 과거에 비해 훨씬 완화된 재벌정책을 내놓았던 참모진은 “나보고 항복선언을 하라는 말이냐”는 노 후보의 말에 따라 강연원고 내용은 원래 노 후보의 정책으로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분배론자라고 부른다.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사회연대의 의미로 분배론자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그것은 옳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고맙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회가 통합된다면 그 자체가 엄청난 국가경쟁력이다.


분배와 성장과 관련해서 노무현의 생각에 가장 가까운 것은 허시만의 터널이론이다.
두개의 차선으로 이뤄진 터널을 지나야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
한 차선은 상류층의 차가 다니고 다른 차선은 중하류층의 차가 달린다.
상류층의 차선은 잘 빠지고 다른 차선은 막히기 일쑤이다.
처음에는 이쪽 차선도 곧 풀리겠지 하고 차선을 바꾸지 않던 사람도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차선을 바꾸려 할 것이고 급기야 양 차선은 모두 정체상태에 빠질 수 있다.
즉 빈부격차가 심해져서 중하류층의 불만이 쌓인다면 그 사회는 더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특히 현재 뚜렷하게 형성되고 있는 특권층이 앞으로 성장의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를 넘어서 학력까지 세습된다면 그 사회의 보통사람들은 희망을 잃게 된다.
“이민이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


그의 7% 성장론은 사회통합을 통해 사람들이 희망을 가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나는 이것을 ‘희망 효과’라고 부른다.
초기 사회주의 나라들의 고성장, 뉴딜 이후의 미국 경제, 1970년대 한국 경제는 희망 효과에 의해 추가 성장이 이뤄진 예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의 경제정책집을 보면 ‘추가된 2%’ 잠재성장률의 근거가 세세하게 제시돼 있다.
잠재성장률은 결국 교육과 기술에 의해서 증가되는 것이므로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노무현은 숨어 있는 잠재성장 여력을 찾아내면 된다고 대답한다.
특히 집에서 사장되고 있는 여성의 노동은 추가 성장의 강력한 동력이다.
북한의 우수한 노동력 역시 잠재성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더 단기적으로는 앞에서 말한 희망 효과가 전체 경제의 생산성을 높일 것이다.


물론 공급 능력만 늘린다고 성장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수요가 발 맞춰서 증가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과잉생산의 위기를 맞기 십상이다.
그러나 수요 면에서 우리는 아주 유리한 환경을 맞고 있다.
올해 중국과 홍콩, 대만, 일본 등 동북아 4개국에 대한 한국의 수출은 미국과 EU에 대한 수출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
이미 동북아시대는 열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 가을에 중국은 전국인민대회에서 앞으로 20년 동안 GDP를 두배로 증가시키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엄청난 규모의 경제가 고성장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확실한 기회다.


뿐만 아니다.
동북아 나라들은 외환보유고를 기준으로 세계 1위부터 4위까지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나라의 외환보유고를 모두 합하면 2조달러에 이른다.
이들 나라의 중앙은행이 공동 행보를 취한다면 투기공격에 의한 외환위기를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삼고초려 끝에 만난 유비에게 제갈량은 정족지계(鼎足之界)를 설파한다.
천하를 삼분해야 어느 나라도 다른 두나라를 동시에 공격할 수 없다.
약한 나라는 이런 균형 상태 속에서 국력을 키울 수 있다.



미국과 EU, 그리고 동북아시대


마찬가지로 동북아의 성장과 협력은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현재 세계는 미국과 EU로 양분돼 있지만 미국의 일방주의에 휘둘리고 있다.
만일 아시아의 협력이 강화된다면 미국은 더이상 일방적 행동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전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도 아시아의 경제적, 군사적 협력은 강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청사진이 실현되려면 무엇보다도 남북의 긴장이 완화되고 나아가서 평화체제가 구축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남북의 협력 강화는 전세계의 안정까지 연결되는 중차대한 과제다.


그는 노사갈등 해결도 약속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사갈등을 근본적으로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유명무실해진 노사정위원회를 명실상부한 3자합의체(tripartite)로 발전시키고 중요한 회의는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겠다고 밝혔다.
스웨덴식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노동의 수급을 맞추는 데도 힘을 기울이겠다고 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용어설명 참조)

지금 세계경제는 신자유주의 흐름 때문에 ‘휘발하는(volatile) 경제’라고 불릴 정도로 불안정성이 극도로 높아진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자기의 약속을 모두 지킬 수 있을지 회의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의 정책방향은 옳다.
국민 전체가 승리하는 경제를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가 얼마나 국민을 움직이느냐가 우리 경제의 재도약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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