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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룰라 ‘희망의 등불’이 켜졌다
[브라질] 룰라 ‘희망의 등불’이 켜졌다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3.01.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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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새해의 첫 태양이 떠오른 2003년 1월1일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 있는 국회 건물 주변은 전국에서 올라온 수십만명의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
지난해 10월 선거에서 압승한 가난한 노동자 출신 좌파 대통령,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의 역사적 취임식을 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혹은 멀리서 버스나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이들은 넓은 광장에서 ‘룰라! 룰라!’를 연호하며 함께 춤추고 노래했다.
호텔에 투숙할 여유가 없어 광장 주변에 쳐놓은 텐트나 지방에서 몰고온 차 안에서 밤을 지샌 사람들이 많았다.


룰라의 고향인 페르남부코에서 밴을 빌려 1321마일을 달려왔다는 24살의 대학생 클레베르 곤자가는 “룰라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직접 피부로 느낀 사람”이라며 새 대통령에게 기대감을 나타냈다.
고향에서 브라질리아까지 오는 여행에 한달치 생활비가 몽땅 들어갔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이 젊은이는 “미래에 내가 가르칠 학생들에게 ‘역사적 순간’에 바로 거기 있었다고 말하기 위해 올라왔다”고 말한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룰라에게 투표하지 않았다는 엔지니어 마리오 바스콘첼로 역시 “브라질을 위해서도 지금은 그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길가에 모여든 시민들은 룰라가 지날 때마다 열광적인 환호로 답했다.
일부는 그의 손을 잡아보기 위해 경호원을 밀치고 행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국민들 기대감에 너도나도 거리로


삼바 축제를 연상케 하는 이러한 들뜬 취임식 분위기는 룰라에 거는 브라질 국민의 기대감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새 정부가 앞으로 4년 동안 헤쳐나가야 할 길은 그다지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룰라는 취임식 연설에서 가난과 부정, 부패에 대한 가차없는 투쟁을 강조하며 “이제 새로운 길을 가야 할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무를 심기도 전에 수확부터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당선 확정에서 취임식까지 3개월 동안 룰라의 노동자당은 경제 회복, 이자율 인하, 일자리 창출이라는 야심찬 계획에서 이미 부분적으로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사정이 더 꼬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남미의 인접국가들보다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하지만, 브라질 경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
성장동력이 고갈된 상태인데다 외국인 투자마저 줄고 있다.
지난해 연간 인플레이션이 1995년 이후 처음으로 두자릿수를 기록하는 등 인플레이션 망령이 되살아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로 이자율은 최근 25%까지 급등했고, 2400억달러에 달하는 순채무도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새 정부의 재무장관에 임명된 안토니오 팔로치는 “현재 사용할 수 있는 금융, 재정 정책이 제한돼 있다”며 올해 예상만큼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용인함으로써 경제성장률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 방안은 결코 채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무책임한 재정운영이나 채무불이행 등의 극단적 방법도 배제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는 이전 카르도수 정부의 경제정책을 상당부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또한 룰라는 자신의 노동자당 소속이 아닌 전문가와 기업인들을 정부의 주요 자리에 임명했다.
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쪽에선 안도했지만, 그의 오랜 지지자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 미국 언론은 이를 두고 브라질의 변화를 주장하던 룰라 자신이 가장 먼저 변했다고 꼬집기도 했다.


재무장관과 함께 브라질 경제팀의 핵심인 중앙은행 총재에는 다국적 금융회사 플리트보스턴파이낸스의 사장 엔리케 메이렐레스를 임명했다.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국제 금융계와 브라질 보수세력을 겨냥한 일종의 ‘포용 정책’이다.
외국 투자자들은 룰라가 자유시장 정책을 포기하거나 어설픈 조처로 경제운영을 망치지나 않을까 우려했던 게 사실이다.
‘채무불이행’을 전격 선언할 것이라는 추측도 난무했다.
UBS워버그는 최근 보고서에서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볼 때 룰라는 카르도수 대통령보다 좀더 개선된 복사판처럼 보인다”고 진단했다.
뉴욕에 있는 ABN암로 신흥시장 담당 아르투로 포르제칸스키는 “룰라에 대한 월가의 태도가 비관론에서 회의론으로 옮겨간 것 같다”고 말한다.



미국과의 관계도 큰 고민거리


일부 금융 전문가들은 외국 투자가들에게 우호적 신호를 더 확실하게 주려면 이달 안에 중앙은행이 물가인상률에 맞춰 이자율을 인상하고, 정부의 재정흑자 폭도 지금보다 확대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IMF로부터 307억달러를 지원 받고 있는 브라질은 협정에 따라 국내총생산(GDP)의 3.75% 규모에 달하는 재정 흑자를 유지해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 등 공공정책 수행에 필요한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흑자 폭을 더 확대하면 공공정책의 위축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부분적 ‘우향우’에도 불구하고 룰라의 기본 노선이 흔들리고 있다고 보는 시각은 아직은 많지 않다.
지난 1월1일 취임식에서 룰라는 “브라질의 진보가 이기심에 바탕을 둔 체제가 만들어낸 경제적, 사회적, 윤리적 파국 때문에 멈춰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자리 창출은 나의 신념이며, 이 나라가 성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던 팔로치 재무장관 역시 “시장의 성장과 외부 투자에 대한 의존이 자동적으로 성장과 평등을 가져온다는 것은 환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30년 동안 브라질의 불평등한 분배구조는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집권 노동자당은 수십년 동안 브라질에서 유지된 시장 중심의 경제정책을 사회적 평등과 정부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번 대통령 취임식에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주요 초청인사로 참석한 것도 상징적이다.
남미의 또 다른 좌파 대통령인 차베스는 부시의 ‘악의 축’ 발언에 빚대 자신과 카스트로, 룰라를 묶어 ‘선의 축’(axis of good)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 자유무역 지대 구상’을 내놓고 남미 국가들을 밀어붙일 태세다.
미 무역대표 죌릭은 “브라질이 만약 부시 행정부의 구상을 거부한다면 남는 건 남극대륙에 물건을 수출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라는 경고도 서슴지 않는다.
이처럼 미국과 복잡한 관계를 효과적으로 풀어나가는 것도 룰라의 고민거리다.


중도파인 브라질민주운동당과 연정에 실패함으로써 룰라는 상원과 하원에서 모두 소수파로 머물게 됐다.
개혁 정책의 추진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그나마 높은 대중적 인기가 현재로선 가장 큰 힘이다.
최근 룰라의 지지율은 대통령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 62%를 넘어섰다.
‘희망이 두려움을 물리친다’는 선거 캠페인 구호가 이제는 룰라 자신에게 더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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