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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예술로 승화된 전쟁의 광기
[영화] 예술로 승화된 전쟁의 광기
  • 이성욱/ <한겨레21> 기자
  • 승인 2003.01.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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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에 이어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가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같은 이름의 영화이고 귓가에 감겨드는 피아노 연주가 아름답지만, 두 영화는 아주 다른 영화다.
한가지 닮은 게 있다.
인간성 혹은 그 본능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아주 불편한 장면들이 기습적으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하네케의 영화는 파괴적인 고통을 주는 것과 받는 것 언저리에서야 사랑을 느끼는 피아니스트의 특별한 내면을 좇아가고, 폴란스키의 영화는 6년간 나치의 눈을 피해 숨어 살면서 최악의 조건을 견뎌내는 피아니스트의 실제했던 사투를 재현한다.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는 홀로코스트를 다루되 정공법보다는 우회로를 택했다.
가스실의 끔찍함에 직접 카메라를 들이대는 대신 가스실을 피해가려 안간힘을 쓰는 한 인간의 처절한 시간을 나열한다.
가족을 수용소에서 잃고 홀로 살아남은 피아니스트 스필만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건 ‘죽음들’이 만든 무거운 공기다.
그런데 때론 그 공기가 아주 기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길바닥에 사람들을 주욱 엎드리게 해놓고 그 뒤통수에 권총을 들이대 즉결 처형하는 장면은, 탁자 위에 올려진 맥주병 뚜껑을 별 생각없이 따나가는 듯한 무덤덤함을 연상하게 한다.
스치듯 지나가지만 이런 순간은 여러번이다.
시체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 인육 타는 냄새가 진동할 때 바로 그 옆에서 빵을 뜯어먹는 사람들과, 굶주림에 시달려 동족의 끔찍한 최후보다 빵에 더 관심의 눈길을 보내는 피아니스트.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란 역사적 고발에 대한 책무에 충실한 영화이지만 이런 장면들을 보다보면, 폴란스키의 개인사가 자꾸 눈에 밟힌다.
폴란드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의 회고록을 토대로 한 논픽션이라는 것보다, 폴란스키 감독 자신이 어린 시절 수용소에 감금된 기억이 있고 어머니를 가스실에서 잃은 과거가 있다는 것 말이다.
또 폴란스키는 1969년 미국 역사의 한장에 기록된 살인광 찰스 맨슨과 그를 추종하는 집단에 배우였던 아내 샤론 테이트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일을 겪었다.


그가 맞닥뜨려야 했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충격을 줬고,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알기 어렵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쉰들러리스트'의 연출 제의를 받았던 폴란스키가 “나 자신을 좀더 객관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거부한 뒤 그리 오래지 않아 이 영화를 만든 것도 약간은 미스터리다.
분명한 건 이 영화가 200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긴 했으나 그의 초기 걸작 '악마의 씨'나 '차이나타운' 같은 ‘거대한 느낌’을 던져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핍박이 아주 오래 지속되는 이 순간, 이제 이런 이야기는 과잉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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