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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일본식 시스템 집착은 모험
[서평] 일본식 시스템 집착은 모험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3.01.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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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기술로 발전했고, 기술은 인간의 손끝에서 나온다.
수십년을 한가지 일만 해온, 나아가 대를 이어온 장인들의 손끝에서다.
그들의 지식·기술이 일본을 먹여살렸다.
기업이 평생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누가 그렇게 일을 하겠나. 일본 기업들은 고용을 보장하며 석유 위기·엔고 위기도 이겨냈다.
” 10년 불황의 결과로 국가 신용등급이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말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늙은 부국’ 일본이 강력한 변화 압력에 직면해서도 고집스럽게 종신 고용이라는 낡은 관행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일본의 한 중소기업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어려움은 잠깐이지만 직원을 내보내면 미래마저 기약할 수 없다는 믿음이다.
물론 대기업들은 앞다퉈 대대적인 인원감축의 칼을 빼들었다.
닛산의 최고경영자 카를로스 곤의 강연회장은 그의 구조조정 성공담을 들으려는 일본인으로 연일 만원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강연장을 빠져나오며 “사람을 해고하고 공장을 폐쇄하는 식의 경영은 누가 못하느냐”고 내뱉는다.
일본 사회는 여전히 감원을 통해 당장의 이익을 내는 기업보다는 도산한 기업 대표가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직원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아냥거림에도 일본식 경제 시스템은 여전히 요지부동인 것이다.
불황이 끝나면 ‘일본 시스템’이 또 한번 그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대다수 일본인은 굳게 믿고 있다.



일본 경제위기 입체적 분석


전후 최악이라는 최근의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일본의 모습은 우리에겐 기이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170조엔 규모로 추정되는 부실채권을 안고 있으면서도 금융개혁을 차일피일 미루고, 이미 국내총생산(GDP)를 훨씬 초과한 666조엔의 국가 채무를 지고 있으면서도 도로건설 등 아무런 효과도 못본 경기부양에 거액을 계속 쏟아붓고 있다.
빚으로 연명하는 ‘좀비 기업’들도 말끔하게 정리하지 않고 있다.
외환 위기를 겪으며 ‘글로벌 스탠더드’로 완전히 뜯어고친 우리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이 한국에 한수 배워야 할 때”라고 느긋하게 말하고 말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일본은 개혁을 정말 못하는 것인가 안 하는 것인가. 그들이 고대하는 변화는 어떤 것인가.

일본의 경제위기를 다룬 수많은 책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두권 있다.
6명의 현역 기자들이 10일간의 현지취재를 통해 엮어낸 '그래도 우리는 일본식으로 간다?'와 지난해 일본 경제를 움직이는 엘리트들의 필독서였다는 화제의 책 '사자는 잠들지 못한다'가 그것이다.
이들은 단순한 문제점 찾아내기에서 벗어나 일본의 경제위기에 대해 입체적인 이해의 실마리를 던져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도…'가 관찰자 시각에서 일본 경제의 복잡한 내면 구조를 들여다본다면, '사자는…'은 탈출구 마련에 고심하는 일본내 ‘이너 서클’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100여명의 각계 인물들을 인터뷰해 재구성해낸 일본 경제의 현실은 한마디로 다면적이다.
일본은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노인 인구의 비율이 늘어나면서 의료비, 연금 등 사회적 부담이 함께 증가하고 있다.
한창 일할 사람들은 줄어들고, 여성들은 점점 더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다.
젊은 세대들은 일정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거나(프리타족), 주거비를 아끼려 부모집에 다시 들어가 산다(파라사이토족). 그러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위기론 속에서도 일본 경제의 기둥인 제조업은 여전히 막강하다.
또한 10년 불황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실제로 ‘생활의 위기’를 체감하는 일본인은 많지 않다.


‘미스터 엔’으로 불렸던 전 대장성 재무관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는 “일본은 부와 소득의 분배에서 굉장한 평등사회”라고 말한다.
일반 국민들이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소득수준도 높다는 말이다.
이들은 소득면에서 지금까지 별로 잃은 게 없다.
아직도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은 특유의 집단의식이 통하는 ‘함께 사는 사회’다.
일부에서는 중앙집권, 계획경제, 분배정책 등 사회주의적 요소를 과감히 청산하고 시장 기능에 충실해야만 일본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의 아이덴티티를 망각한 미국 추종자로 폄하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책 타이틀에 의도적으로 물음표(?)를 집어넣었듯이 이러한 ‘일본식’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엔 회의적이다.


일본 경제인이 새뮤얼 라이더라는 필명으로 썼다는 '사자는…'은 일본의 난제인 국가부채와 부실채권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충격적 해법을 제시한다.
우화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사자왕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가리킨다.
계속되는 경제위기에 직면한 사자왕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씨를 뿌리는 ‘파괴 대마왕’ 역할을 자임하고 ‘X프로젝트’를 전격 실행한다.
연휴를 하루 앞둔 어느날 저녁 사자왕은 TV에 나와 ‘뱅크 홀리데이’(예금봉쇄)를 선언한다.
화폐 단위를 낮추는 디노미네이션과 새로운 엔화 교환 조처도 잇따라 단행한다.
이렇게 되면 순식간에 장롱속에 순겨둔 재산이나 거대 지하자금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



구조개혁보다 고통 분담하자?


또한 새로운 엔화와 바꿀 때 국민 개개인의 재산 정도를 기록하고 이 자료를 토대로 재산세를 부과하면 정부는 막대한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
일본 국민의 금융자산을 1400조엔이라고 보고 여기에 30%의 재산세만 부과해도 420조엔이다.
게다가 새로 드러난 지하자금에 부과한 세금으로 420조엔을 거둬들이면, 손쉽게 840조엔 규모의 거액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170조엔의 부실채권과 666조엔의 국가부채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규모다.
‘X프로젝트’가 실제 일본 정부의 정책으로 나타날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불과 몇년 전에 인도네시아가 예금봉쇄를, 러시아가 디노미네이션과 루블화 절하를 단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X프로젝트’의 가능성 여부보다 더 주목할 만한 시사점이 있다.
바로 일본이 미국식 구조개혁보다는 “국민 전체가 한 람도 빠짐없이 고통을 분담”해 위기를 돌파한다는 일본식의 모험에 더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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