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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盧노믹스 / (끝) 분배와 성장
[기획연재] 盧노믹스 / (끝) 분배와 성장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3.01.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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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차기 정부가 맞닥뜨린 현실은 살벌하다.
세계경제 불황과 국제자본의 빠른 이동으로 경제 생태계는 위기에 직면했는데 아직 뚜렷한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17세기 네덜란드처럼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새로운 해외시장을 개척해볼 수도 있겠지만 한반도 안보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20세기 중반 스웨덴처럼 노사 단합을 통해 성장잠재력 상승을 꾀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국제 이동이 자유로워진 자본과 노동력은 쉽게 손을 잡으려 들지 않는다.
우리가 제대로 된 소득분배구조를 구축하기도 전에 세계화 물결은 한반도 안방으로 밀려들어와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당선자의 지지기반인 서민, 청년층은 분배구조 개선과 경기진작을 동시에 요구한다.
그는 어떤 전술, 전략으로 이 난국을 헤쳐나가겠다는 것일까?

노 당선자의 첫번째 전술은 ‘달래기’다.
그는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며 국내외 기업들을 달래고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며 서민을 달랜다.
지지세력만 챙기진 않겠다며 정치인들을 달랜다.
경제 정책의 구호는 시나브로 바뀌었다.
2002년 초 민주당 경선 때만 해도 ‘분배를 통한 성장’이었던 것이 대선을 거치면서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이 됐다.



경제활동 의욕 높여 성장동력으로 이어간다


최근 그는 분배 우선주의자라는 ‘강성’ 이미지를 벗으려고 노력한다.
1월18일 TV 토론회에서 그가 한 말이다.
“노무현이 분배 우선이라는 보도가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성립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분배만 우선시하면 나중엔 분배할 것이 없어집니다.
이론적으로, 성장이 있어야 분배도 할 수 있습니다.


대선 이후 마음이 바뀌었다? 그건 아니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발표한 구체적 방안을 살펴보면 대선 전후로 크게 바뀐 것이 없다.
방향은 네가지다.
고용 확대, 복지 확대, 불로소득 과세 강화, 차별금지. 대체로 사회적 합의를 무리 없이 이끌어낼 만한, 무난한 정책이다.
고용차별 금지 등 일부 정책은 한나라당 공약사항이기도 하다.


몇몇 정책에 대해선 한나라당과 재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상속증여세 완전 포괄주의 도입, 비정규직 동일노동 동일임금 지급 정책이 그렇다.
사실 상속·증여세 완전 포괄주의는 위헌 여지가 있다.
완전 포괄주의가 적용될 경우, 실질적 부의 이전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확인되면 그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
즉 부의 이전에 대해 더 엄격하게 세금을 부과할 근거가 생긴다.
그런데 우리 헌법은 조세를 법률로 정하는 조세법률주의를 택하고 있다.
완전 포괄주의를 채택한 다른 나라의 헌법은 조세법률주의가 아니다.
이에 대해 노 당선자는 “헌법을 바꿔서라도 관철시키겠다”며 의지를 불태운다.
헌법은 국민적 합의를 통해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의 여론은 재벌 개혁, 분배구조 개선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정우 간사는 “완전 포괄주의는 변칙 상속을 한 극소수 재벌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서 도입에 대한 자신감이 얼핏 비친다.


하지만 비정규직 동일노동 동일임금제 도입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재계는 “정규직의 고용 보호, 임금 수준이 높은데 비정규직 임금까지 높이면 어떻게 장사하라는 말이냐”며 원성을 높인다.
사정은 중소사업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들 사업장에서는 비용이 증가하는 게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심지어 노동부 방용석 장관조차 1월22일 인수위 토론 자리에서 노동유연성 확보를 이유로 제도 도입에 난색을 표했다.



고용·복지 확대, 불로소득 과세 강화, 차별금지


노 당선자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를 도입해야 노동유연성이 높아진다고 이들을 설득한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해고가 까다로워 기업들은 정규직 채용을 꺼리고 비정규직 임금이 낮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해고나 비정규직 취업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비정규직에 동일임금 동일노동을 적용하면 비정규직이 늘어 노동유연성이 높아진다.
” 그의 의지는 견고하다.
인수위 토론회에서 반대 의사를 나타낸 방 장관은 “노동장관이 하는 일이 뭐냐”는 호통을 들어야 했다.


변화 분위기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무르익어간다.
국민 여론이 분배 개선과 재벌 개혁쪽으로 기울자 한나라당 안에선 기존 정책 방향의 변경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내년 총선을 의식해서라도 집단소송제 같은 대중성 높은 정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대통령 당선자가 이례적으로 야당을 방문해 야당 대표한테 정책 공조를 부탁한 뒤, 정치판의 변화 분위기는 한층 더 높아졌다.


그러나 설사 차기 정부의 분배정책이 모두 다 도입된다고 해도 세계적인 소득 양극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은 미세 조정책이다.
거대한 세계화 파도 속에 한국호가 뒤집어지지 않을 정도로 균형을 유지해줄 뿐이다.
소득 양극화란 태풍은 이미 한 나라 정부만의 힘으로 잠재울 수 있는 규모 이상으로 자라났다.
그 태풍은 세계화 기류를 타고 움직인다.


우리나라 소득분배 구조 역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세계화가 급진전되면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소득불균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97년보다 3%포인트가량 높아졌다.
10분위분배율은 5년 동안 9%포인트 낮아졌다.
하위 40% 소득이 상위 20%의 소득에 비해 그만큼 적어졌다는 이야기다.
중산층은 줄어들었다.
이정우 인수위원이 경북대 국제통상학부 교수 시절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97년과 98년 사이 중산층은 5%포인트가량 감소했다.


중산층이 얇아지면 기업의 성장 기반은 약해진다.
대표적 내수기업인 CJ의 김주형 사장은 중산층이 두터워져야 기업이 큰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5인가족 중 연소득이 5만달러, 우리돈으로 6천만원 이상 된다고 느끼는 가족이 얼마나 됩니까. 1인당 GDP 1만달러가 남의 얘기로 들린다는 건 빈부격차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에요. 빈부격차가 줄고 중산층 폭이 두터워져야 기업의 시장도 커집니다.
그래야 1인당 GDP 1만5천달러시대도 열 수 있습니다.


다른 선진국들은 과세나 사회부조를 통한 소득분배로 자기 시장을 지킨다.
한국조세연구원 현진권 연구원은 소득으로만 보면 호주의 지니계수가 0.46으로 한국보다 0.1 이상 높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조세, 사회부조 이후엔 0.3 수준으로 낮아진다.
조세와 사회부조가 소득불균등 현상을 그만큼 조정해주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적용하기 쉽지 않은 해법이다.
국제자본, 다국적 기업에 잘 보여야 하는 형편에 과세율을 높이는 데엔 한계가 있다.
사회부조 문화도 매우 빈약하다.


희망은 없는 걸까? 좀더 시선을 멀리 던져보자. 지구 반대편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에서는 제3회 세계사회포럼(WSF)이 열리고 있다.
다보스포럼이 선진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에 반대해 반세계화를 주장하는 포럼이다.
올해엔 한국의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민주노총, 한국노총 대표단 30명을 포함해 미국의 진보학자 노엄 촘스키, 미국 녹색당 당원인 영화배우 수잔 서랜든 등 세계 비정부기구(NGO) 회원 10만여명이 참석했다.
이 포럼의 창설을 주도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23일 개막행사에 참석한 뒤 바로 다보스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로 향했다.



새 시장 창출로 아시아 유동자금 끌어들어야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김비환 교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거스르는 세력이 정치세력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60년대 신좌익(New Left) 운동이 일어나 자본주의 특유의 부작용을 조정했듯 또 다른 조정 세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작은 희망의 신호 중 하나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주도할 만한 일은 못 된다.
차기 정부의 과제는 일단 국제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면서 분배구조 악화를 막는 것이다.
문제는 게임의 룰이 워싱턴 컨센서스, 즉 거대국의 논리에 맞도록 짜여져 있다는 데 있다.
그러면 지금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예 새로운 판,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그럴 만한 에너지가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1월20일치 보도에 따르면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아시아 은행 시스템에는 9500억달러 상당의 과잉 유동성이 존재한다.
아시아 투자자들이 아시아 화폐를 믿지 못하게 된 까닭이다.
현재 아시아지역의 달러표시채권 발행 규모는 연평균 400억달러. 나머지 돈은 미국 국채 등 안전한 투자처를 찾아 세계 자본시장을 떠돌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 선임연구위원은 이 돈을 주목한다.
아시아의 막대한 유동성을 흡수할 만한 화폐, 투자처가 존재한다면? “공신력 있는 동아시아개발은행이 설립되면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아시아공통표시화폐를 발행해 화폐공신력이 낮은 나라 화폐와 채권에 보증을 서주는 것이죠. 북한이나 중국 서북 지방처럼 개발이 안 된 지역에 투자를 추진하면 아시아지역 과잉설비 문제도 해소할 수 있습니다.
” 새로운 투자로 경제성장이 촉발되면 정부는 분배구조를 가다듬을 여유가 생긴다.
경제성장기에 유럽, 미국이 그랬듯.

동북아 중심국 건설은 차기 정부 10대 과제 중 하나다.
성패는 동아시아 나라들의 공조 여부에 달려 있다.
동북아 중심국 자리를 노리는 나라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분배를 둘러싼 진짜 전쟁은 나라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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