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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흔들리는 한국금융
[기획연재] 흔들리는 한국금융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3.04.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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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5일 신라호텔 영빈관. 밤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한국금융감독원 최공필 선임연구위원과 UBS워버그 이승훈 상무의 발제가 끝났다.
그러나 포럼에 참석한 CEO들의 질문 공세는 그 늦은 시간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은행 해외지점 상황을 보면 97년 9월과 비슷해요. 자금 롤오버(이월)가 여의치 않다는 건 상당히 불안한 신호입니다.
긴장돼요. 6월쯤 북핵 논의가 시작되면 위험한 상황으로 갈 수도 있지 않겠어요?”(우리금융그룹 윤병철 회장)

“이라크전이 끝나도 달러 약세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환율 전망은 어떻습니까?”(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

“금융위기 해소를 위해선 경제성장이 관건이라는 말씀이신데, 성장동인으로 어떤 것이 있죠?”(삼성증권 황영기 사장)

결국 한국CEO포럼 사무국장인 가톨릭대 곽만순 교수가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이 오랜만에 오셨으니 한턱 쏘시라”며 CEO들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가볍게 맥주 한잔 하자고 옮긴 뒤풀이 자리에서도 CEO들은 최공필 위원의 비관적 견해와 이승훈 상무의 낙관적 전망을 둘러싸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날 포럼에 참석한 CEO 61명한테 벌인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전원이 현 경제상황이 우려할 만한 수준이거나 이미 심각한 위기상태라고 답했다.
곧 회복될 것이라고 보는 CEO는 단 한명도 없었다.
경제성장률에 대한 전망은 이 정도로 나쁘진 않았다.
3~3.9%가 응답자의 55%, 4~4.4%가 응답자의 29%로, 대체로 2001년과 비슷한 수준의 성장을 기대하고 있었다.
두 질문에 대한 상이한 응답결과는 CEO들의 현실 인식과 미래 전망 사이에 발생한 묘한 괴리를 짐작하게 한다.
그 괴리를 일으킨 것은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다.


금융위기론이란 유령이 한국 경제를 배회하고 있다.
사람들은 긴장한다.
97년에도 태국 바트화 폭락 여파로 난데없는 금융위기를 맞이한 적이 있지 않은가. 동남아 외환 위기가 전염되자 한국 경제는 치명적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빚투성이인 기업 재무, 관치에 찌든 금융 시스템, 안이한 정부 대처 등 취약 부분부터 한국 경제는 무너졌다.
5년여 전의 악몽 속에 한국 금융 시스템은 다시 유동성 위기에 봉착했다.


정부와 낙관론자들은 말한다.
“외환보유고는 충분하다.
기업 펀더멘털은 튼튼하다.
아시아 어느 나라 못잖게 구조조정도 잘 해냈다.
가계부채가 급속히 늘어 우려를 낳고는 있으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만한 수준은 아니다.
미국 경제는 곧 회복 국면에 접어들 것이고 중국은 계속 한국의 시장이 되어줄 것이다.
이라크전, 북핵 위기 같은 외생변수가 해소되면 한국 경제는 다시 굳건함을 회복할 수 있다.


비관론자들은 말한다.
“세계의 시장, 미국 경제는 아직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달러 헤게모니도 흔들리고 있다.
프랑스, 독일 등 반전국과 미국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정책공조 시스템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북핵에 대해선 미국과 북한의 견해 차가 커 조속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심리적 요인에서 비롯한 소비, 투자의 위축은 실물경제로까지 파급돼 경제를 마비시키고 있다.
금융 민감도도 높아져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의 파장이 예상보다 확대될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제2의 금융위기가 오지 말란 법이 없다.


엇갈리는 분석과 전망 속에 사람들의 불안은 커진다.
짙은 안개는 길 가는 이의 발걸음을 주춤거리게 만든다.
사람들의 심장을 움켜쥐게 하는 금융위기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부채가 많으면 금융 민감도 높아져

엇갈리는 인식과 전망 속에서도 일치점은 있다.
한국 금융시장이 충격에 예상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3월 중순 일어난 MMF(머니마켓펀드) 환매 대란이 대표적인 예다.
SK글로벌 편입 펀드에 대한 환매 요구로 치솟은 불길은 이내 MMF 환매로 옮겨붙었다.
환매를 해주려면 펀드에 편입된 채권을 팔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
펀드 안에 특정채권, 즉 카드채 물량이 30%에 이르러 이것이 제때 팔리지 않은 것이다.


MMF가 환매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자 투자자들은 너도 나도 환매를 하겠다고 달려들었다.
현금 유동성이 풍부한 은행들은 환매 요구에 응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일부 증권사들은 환매를 중단해야만 했다.
MMF는 아침에 넣었다 저녁에 뺄 수 있는 현금성 상품이다.
이 정도면 지불 불능 사태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단순히 충격 흡수 과정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기엔 민감성이 너무 높다.
3월10일 62조원에 이르렀던 MMF 수탁고는 17일 45조원으로 줄어들었다.
1년 동안 야금야금 늘어난 수탁고가 일주일 만에 고스란히 날아갔다.


한국 금융시장을 민감하게 만든 근본 원인에 대해서도 분석가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가계부채.’ 금융감독원 감독정보팀 김광식 팀장은 가계 재무구조의 불건전성 탓에 가계가 외부 충격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실물경제에 영향을 줘 경기침체를 가속시켰고 다시 기업 경기를 악화시켜 가계의 부채 상환 능력을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
부채 상환 능력 저하는 금융사를 궁지로 몰아세우고 있다.
97년 금융위기가 기업의 과다한 외채에 기인했다면 이번 위기의 조짐은 가계의 과다한 내채에서부터 번지고 있는 셈이다.


97년과 현재의 자산 건전성 추이를 비교해보자. 가계 건전성은 떨어지고 기업 건전성은 높아졌다.
97년 46.6%였던 가계부채/GDP 비율은 지난해 75%로 급상승했다.
반면 97년 396.3%에 달하던 기업부채/자본 비율은 지난해 130%로 크게 줄어들었다.


채권 발행 추이에서도 불균형은 드러난다.
3월초 기준으로 ABS를 포함한 카드채 규모는 51조원이 넘는다.
3월초 회사채 전체 발행잔액은 67조원. 한 나라 전체 회사채의 75%를 넘는 규모의 엄청난 돈이 카드라는 단일 산업에 몰려든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카드사가 발행한 기업어음(CP)까지 포함하면 카드채 규모는 9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비, 투자심리 위축이 겹쳐 경기침체가 오자 금융권의 가장 약한 부분부터 탈이 나기 시작했다.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할부금융 대출 등 은행권에서 대출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서비스 말이다.
2월 카드사 평균 연체율은 13~14%로 치솟았다.
카드사가 관리할 수 있는 연체율 수준인 7%보다 두배나 높은 수치다.


할부금융사의 대출 연체 상황은 더 심각하다.
할부금융사의 1개월 이상 가계대출 연체율은 20~25%까지 다다르고 있다.
지난해 카드론사업을 경쟁적으로 확장한 탓이다.
카드론부문의 경우 신용불량정보 등록건수 증가율이 전월 대비 26.65%로 나타나 신용 카드대금 연체(17.57%), 대출금 연체(10.06%)보다도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상대적으로 건전한 것으로 평가받는 은행권도 상황이 좋지 않다.
우선 SK글로벌 사태로 충당금을 더 쌓아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다.
가계대출금 연체율도 높아지고 있다.
북핵 위기로 한국 은행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외화차입금의 만기연장이나 신규 차입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그 탓에 예년이면 무사히 지나갈 일본 법인의 3월 결산 신드롬도 이번엔 톡톡히 치르고 있다.
일본 은행들은 결산을 앞두고 해외 차입금을 거둬들이는 관행이 있는데, 이것이 원화 약세와 겹쳐 외화 수급에 차질을 빚고 있는 것이다.


금융위기는 금융사의 신용도 하락으로 가시화하고 있다.
3월26일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정보, 한국신용평가 등 3개 신용평가사들은 주요 신용카드사에 대한 신용등급을 일제히 하향 조정하고 전망을 조정했다.
연체율이 급등해 자산건전성이 떨어졌고 카드채 금리 상승으로 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커질 전망이라는 이유였다.
28일엔 모건스탠리가 카드 연체율과 중소기업 연체율 증가, SK글로벌 사태, 1조원의 주식 투자를 이유로 국민은행의 투자의견을 비중축소로 하향했다.
신용등급 하향이 통상 시장 평가에 후행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금융권의 신용위기는 이제 발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굿모닝신한증권 김일구 수석연구원은 “외부상황에서 발생한 위기가 내부화되는 국면에 들어섰다”고 분석한다.



금융 구조조정 가속 붙을까

한국 경제가 97년과 같은 위기국면에 들어서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단정하기엔 시기상조다.
외국인 투자자는 북핵 위기 고조에도 불구하고 한국 주식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지 않고 있다.
기업의 현금 흐름은 어느 때보다 좋다.
UBS워버그 이승훈 상무는 “일본의 장기 호황기처럼 기업 현금이 채권, 주식, 부동산 등 자산가격을 끌어올리고 개인의 주식 투자가 늘어나는 선순환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나타낸다.
이 가정의 전제는 자산 가격이 하락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SK글로벌 사태로 채권시장이 얼어버린 전례에서 보듯 현재 한국 자산시장에선 위험의 가격이 제대로 책정되지 않고 있다.
수요, 공급자간 합리적인 가격 결정은 자산시장이 효율적으로 돌아가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대우증권 IB1사업본부 정유신 이사는 “가격이 제대로 정해지지 못한다는 것은 수요, 공급자의 리스크 판단이 다르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이라크전, 북핵 위기 등 비경제적 사건에 금융시장이 과민반응을 보이게 된다.


사실 금융시장의 이런 반응은 개발도상국이라면 대부분 피할 수 없는 고질병이다.
한국금융감독원 최공필 선임연구위원은 “후진국 금융은 위험 식별과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상황에 의존적이고 그에 따라 돈줄을 왕창 늘렸다 줄이곤 한다”고 설명한다.
금융이 이러한데 실물경제가 버텨내기란 쉽지 않다.


한국 금융에 필요한 노력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자산시장의 리스크 처리능력 개선, 선진금융 시스템 확충. 물론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산업구조의 개선이다.
투신, 증권사 구조조정과 과열된 카드산업 등 금융권엔 미해결 과제가 널려 있다.
정부는 푸르덴셜과 현대투신증권 인수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면서 금융권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위기의 순간이 닥칠 때마다 어려운 숙제를 해내곤 한 전력이 있다.
이번 위기도 기회로 전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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