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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터키 - 미국의 ‘선물’에 멍드는 민심
[글로벌] 터키 - 미국의 ‘선물’에 멍드는 민심
  • 최우성 기자
  • 승인 2003.04.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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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세계은행 막대한 자금 지원… 긴축재정 결과 국민들 고통만 가중

위기로 치달았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두 가맹국 미국과 터키 사이의 관계는 이제 극적으로 회복될 것인가? 유럽 방문길에 나선 미국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4월2일(현지시각) 터키에 들러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방안에 대해 터키 지도자들과 의견을 나눴다.
그 결과 터키 정부는 이라크 전쟁에 참가한 미군 병력에 대해 식료품과 연료 및 의약품을 제공할 뿐 아니라, 전투 도중 부상당한 미군 병력이 터키 영내로 긴급 후송돼 치료받도록 하는 데 동의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로써 지난 3월1일 터키 의회가 이라크 북부와 국경을 접한 터키에 미국 군대 주둔을 승인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면서 냉각 상태에 접어든 두나라 사이의 긴장관계는 일단 진정국면에 들어서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애초 터키 의회의 결정이 내려진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 미국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불리던 터키를 비난하는 여론이 미국 내에서 거셌고, 일부 해외 투자자본이 터키 시장에서 빠져나가면서 터키 경제는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이라크 북부전선을 포기한 미국으로서도 전쟁 개시 초반부터 상당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곤경에 빠진 미국 정부가 서둘러 터키에 다양한 압박을 가하는 한편, 달래기에 나선 데도 이런 사정이 한몫 했다.



미국과의 갈등, 불씨는 여전

물론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이번 방문을 계기로 미국으로서는 터키의 동의를 어느 정도 끌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터키와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갈등의 원인 가운데는 무엇보다도 유럽연합 가입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는 터키 정부로서는 유럽연합의 주요국가인 프랑스와 독일 등이 이라크 전쟁에 반발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방적으로 미국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자칫 이들 유럽 나라들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고 나선 탓이다.

여기에는 쿠르드족 문제라는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제가 한데 뒤얽혀 있다.
터키 정부는 사담 후세인 정부의 붕괴가 자칫 이라크 북부지역에 근거를 둔 쿠르드족의 독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를 처음부터 숨기지 않고 있다.
실제로 미군의 자국 내 주둔을 승인하지 않았던 터키 정부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이라크 북부지역까지 자국 군대를 파견해 쿠르드족의 움직임을 단속하고 나섬으로써 미국 정부의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이라크 전쟁과 관련한 터키 정부의 정책, 특히 터키 국민들의 숨겨진 민심을 정확하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들뿐만 아니라, 지난 몇년간 터키 경제가 걸어온 길을 되새겨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지적도 한편에서는 제기되고 있다.
이런 해석은 터키 정부의 지지를 확신한 미국 정부가 의외의 일격을 당한 것도 결국 터키 경제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는 자성의 목소리와도 한데 엇물려 있다.

지난 4년 동안 IMF와 세계은행을 전면에 내세운 미국 정부는 이슬람 세계에서 미국의 가장 든든한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경제위기에 빠진 터키에 막대한 양의 돈을 쏟아부었다.
99년 이래 IMF가 투자한 액수만 모두 300억달러에 이르는데다 세계은행 역시 이와는 별도로 70억달러를 제공했다.
이라크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에 미국 정부는 300억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추가로 지원하겠다며 터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공을 들였다.



실업자는 늘고 소득은 줄고

그럼에도 이미 오래 전부터 터키 국민들 사이에는 IMF로 상징되는 세계 금융질서에 대해 반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자금 지원의 대가로 IMF가 내세운 긴축 재정정책의 결과, 실업자 수가 수백만으로 늘어나고 부도가 잇따르는 등 피부로 느끼는 체감경기가 극도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지난 2001년 한해 동안에만 터키 GDP는 전년도에 비해 9.4% 줄어들기도 했다.
통화가치가 반으로 떨어지면서 소득이 크게 줄어든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3월31일 터키 정부는 지난해 4분기 동안 터키의 경제성장률이 11.4%에 달했다는 통계자료를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전체 6800만 인구 가운데 실업자는 여전히 11%를 넘어선 상태다.
막대한 외부 자본 유입에 따라 통계수치상으로는 경제가 호전될지 모르지만, 일반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좀처럼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음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지난해 11월 집권에 성공한 현 정의개발당(AKP)이 내건 슬로건 역시 IMF 정책에 반대하고, IMF와 즉각적인 재협상에 착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한데도 미국의 입김 아래 놓인 IMF는 국가 당 대출제한액을 1600%나 넘어서는 액수를 터키에 쏟아붓는 데만 관심을 쏟았을 뿐이다.
이뿐이 아니다.
세계은행 역시 지난 한해 동안에만 모두 35억달러를 제공해 터키를 ‘최대고객’ 자리에 올려놓기도 했다.
모든 경우에 일반국민들에게는 큰 고통이 따르는 가혹한 조건이 따라붙은 건 물론이다.

이처럼 이번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불거진 터키의 독자행보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한데 얽혀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IMF체제로 상징되는 터키 경제의 현실을 특히 눈여겨봐야 한다는 목소리는 이 와중에서도 갈수록 힘을 얻고 있는 중이다.
다급해진 미국 정부가 자칫 또 다른 선물보따리를 마구 풀어놓으며 터키 국민들을 일시적으로 달래려 들다가는 자칫 더 심각한 자충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이런 사정과 분명 맥이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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