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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영권도 사냥감, 정글 자본주의
2. 경영권도 사냥감, 정글 자본주의
  • 이원재 기자
  • 승인 2003.04.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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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치·머독·버핏 등 대표적 사냥꾼…경영 실수·도덕적 허점 보이면 공격 대상

적대적 인수합병(M&A)은 정글과 같은 현대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린다.
자본주의의 본질인 무한경쟁원리를 기업 경영권에까지 도입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적대적 인수합병은 기업들이 상품시장에서 소비자를 대상으로 경쟁하고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듯이, 기업주들도 자본시장에서 경영권을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적대적 인수합병의 공격쪽에 서는 사람들은 ‘침입자’(raider)라고 불린다.
이들은 자본시장이라는 정글에 뛰어들어, 가치에 견줘 주가가 떨어져 있는 사냥감을 탐색하고 인수한 뒤 팔아치워 막대한 차익을 남긴다.
그렇게 확보한 자금을 들고 또 다른 인수합병 사냥감을 찾아나선다.
최근 미국 시장에서 이런 ‘침입자’로 활약하는 사람들은 로버트 바스, 데이비드 머독, 마리오 기벨리, 아서 에들먼 등인데, 이들은 한건의 공격을 성공시켜 적게는 1천억원에서 많게는 5조원 정도까지 이익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침입자 가운데서도 자금동원력이 가장 크고 기업인수 규모도 크기로 유명한 미국 투자회사 키스톤 사장 로버트 바스의 전형적인 적대적 인수합병 전략을 살펴보자. 텍사스의 억만장자인 그는 일단 기업가치는 높으나 주가가 낮은 사냥감을 정하고 나면, 우선 그 기업의 주식을 대량 매집한다.
그리고는 이 기업이 특정 사업을 매각하고 구조조정을 거치면 현재보다 주가가 몇배로 뛸 수 있는데, 그동안 기존 경영진이 불투명하고 불합리한 경영을 해왔기 때문에 주가가 바닥이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현재 주주들과 기존 경영진에게 보낸다.



로버트 바스의 적대적 M&A 전략

바스는 그 뒤 현재 주주들을 규합해 회사정상화 대책위원회 등을 만들어 세력을 형성해가며 의결권을 모은다.
그리고 의결권 확보 현황을 언론에 발표하면서 여론의 주목을 끈다.
해당 기업의 주가는 마구 치솟고, 투자자들은 맹목적으로 주식을 매집하는 세력에 가담하게 된다.
결국 주식은 거래량이 점점 줄어든다.


주가가 하늘을 찌르고 거래량이 거의 사라질 즈음, 바스는 이 비싼 주식을 담보로 외부에서 새로 자금을 조달한다.
그리고 자금 조달 가능성이 높아지면 이를 언론에 공표하고, 이 자금으로 일반투자자들이 갖고 있는 그 기업 주식을 비싼 값에 @공개매수@하겠다고 발표한다.


이렇게 되면 기존 경영진은 보통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출해줄 @백기사@를 물색하거나 바스에게 연락해 타협을 요청한다.
그러면 바스는 일단 백기사와 주식 매각 협상을 하거나 현 경영진과 @그린메일@ 규모를 협상한다.
이 때 백기사나 현 경영진쪽에서 제시하는 보상이 흡족하다면 주식을 모두 팔아버리고, 그렇지 않다면 높은 프리미엄을 붙여 공개매수에 나서면서 주가를 더욱 올린다.
이때쯤 되면 공격 세력은 모든 언론과 투자자들의 관심거리가 된다.
일부에서는 영웅으로 치켜세우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비난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주가는 점점 더 오른다.


이 단계에서 바스는 그린메일을 챙기기보다는 @황금알@을 매각해 차익을 챙기는 쪽으로 전략을 바꾼다.
보유주식을 활용해 경영권을 빼앗고 난 뒤에는, 그 기업의 핵심사업이나 자회사 경영지배권을 매각해 투자차익을 챙긴다.
때로는 경영권을 통째로 그 기업의 원래 경쟁사에 팔아넘기기도 한다.
그 돈을 챙기면서 또 다른 사냥감 탐색을 시작한다.


실제로 금융판의 베일에 가려진 침입자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본주의의 영웅으로 부르는 많은 미국 경영자나 투자자들은 수많은 인수합병을 거쳐서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
GE(제너럴일렉트릭) 전 회장 잭 웰치, 뉴스코퍼레이션스 회장 루퍼트 머독, 버크셔 헤서웨이 회장 워런 버핏 등이 대표적인 이들이다.


잭 웰치는 1981년 GE 회장에 취임해 4년 동안 130여개의 회사 또는 사업부서를 매각했고, 6년 동안 350여개의 기업을 사들였다.
당시 소유하고 있는 기업을 매각해 벌어들인 현금은 90억달러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GE는 미국 경제잡지 <포천>이 선정한 세계 6대 기업에 들었고, 91년에는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 선정 세계 초우량 기업 1위에 올랐다.


잭 웰치는 @차입매수(LBO)@나 부동산을 활용한 기법을 사용해 기업을 인수합병하는 GE캐피털을 자회사로 거느리면서, 씨티그룹, 체이스 맨해튼, 모건은행 등 초대형 금융사들과 간접적인 이사진 겸임관계를 맺어 각종 인수합병 작업에 활용했다.
그의 사냥감에 오른 기업은 항공, 금융, 정보, 의료, 방송, 신기술, 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에 있었고, GE는 거의 전분야에 걸쳐 세계 최고 기업을 거느린 초우량기업 반열에 올랐다.


“소유하고 싶은 기업의 주식을 사라”며 가치투자를 고집하기로 유명한 워런 버핏은 자신의 명언대로 기업의 주식을 사들여 실제로 소유하는 데도 능했다.
그리고는 사업을 재구축하고 합병 뒤 분할매각하는 기업 사육사 노릇을 하며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세계 10대 부호가 됐다.
버핏은 캐피털 시티즈가 텔레비전을 합병시키는 과정에 참가해 수백억원의 주가 차익을 얻었다.
85년 한해만 해도 인수합병으로 3천억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


‘미디어 제국의 황제’ 루퍼트 머독도 인수합병을 통해 전세계에 그의 제국을 구축했다.
뉴스코퍼레이션스는 머독이 투자금융사들로부터 끌어온 막대한 현금을 등에 업고 미국의 케이블방송 <폭스뉴스>, 위성방송 <디렉TV>, 홍콩의 위성방송 <스타TV>, 영국의 신문 <더 타임스>, <선>, 이탈리아의 위성방송 <텔레피우> 등 전세계 곳곳의 미디어사업을 착착 인수해가고 있다.
특히 머독은 한 국가에 진출할 때, 주요 매체 한군데를 인수해 거점을 마련한 뒤 인수합병 작업을 통해 시장점유율을 최고로 만들어놓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경제 역사는 M&A의 역사

사실 ‘정글 자본주의’의 중심지 미국에서는 이런 영웅들뿐만 아니라 ‘영웅적 기업’들도 다들 사업만 착실히 키워서라기보다는 인수합병을 통해 단기간에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
GE, GM(제너럴모터스), 듀폰 등 미국 초우량기업들이 다들 그렇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은 경제의 역사가 바로 기업 인수합병의 역사라고 봐도 될 만큼 인수합병의 뿌리가 깊다.


실제로 미국에서 인수합병이 처음 붐을 일으킨 건 19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문가들은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에서는 5차에 걸쳐 인수합병 붐이 일어났던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1차 열풍에서는 미국 자본주의의 근간이 된 단일업종 대기업들이 출현했다.
1890년대 미국에는 처음으로 인수합병 붐이 일어난다.
이때 주로 일어난 인수합병은 동일산업 안에서의 수평결합이었다.
특히 석유, 담배, 철강, 금융업종에서 수평적 결합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절정기에는 인수합병이 연간 1천건에 이를 정도였다.
이와 함께 이들 업종에서 전국을 아우르는 대기업이 출현한다.
그리고 이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미국 경제는 여러 지역경제의 연합체 성격을 벗어나서, 전국이 단일시장권으로 통합됐다.


2차 열풍에서는 기업들의 수직적 통합이 일어나면서 동일산업을 단일 거대기업이 지배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주식시장이 대활황을 보였다.
잇따른 인수합병은 시장에서 호재로 평가되면서 주가를 끌어올렸다.
여기서 큰 이익을 얻은 투자자들은 다시 이 자금을 인수합병에 나서는 데 썼다.
그러면서 인수합병 열풍은 점점 거세졌고, 주가는 더 힘을 얻었다.
역설적으로 주식시장에는 그만큼 거품이 많이 생겨났고, 이는 1920년대 말 대공황이 일어나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꾸로 대공황으로 주가가 폭락하자 싼값에 기업들을 사들이는 기업 사냥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때 기업 인수합병은 대부분 수직적 통합 형태였다.
이는 1914년 생긴 반독점법인 클레이튼법에서 독점을 우려하며 수평적 기업결합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부품업체, 소재업체, 원료업체 등이 원청 대기업에 통합되는 형식이 주류였다.
당시 자동차회사 포드는 수직적 통합을 통해 자동차부품은 물론, 자동차용 철강까지 생산하는 거대기업이 됐다.
‘원료에서 완제품까지’라는 구호가 나오기도 했다.


한편 클레이튼법은 주식인수 방식 기업인수를 제한해, 이 시기에 자산만 떼어 인수하는 P&A 방식이 처음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3차 열풍 때는 미국 기업들의 ‘재벌화’가 진행된다.
무분별한 인수합병이 대공황을 부추겼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1950년에 독점금지를 한층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클레이튼법이 개정된다.
그런데도 60년대 미국 경제가 좋아지면서 다시 인수합병 열풍이 일어난다.


하지만 클레이튼법으로 동일업종 내 인수합병은 매우 어려워진 상태였다.
이에 따라 50년부터 68년까지의 기업 인수합병은 ‘복합기업’을 탄생시킨다.
복합기업이란 우리나라의 재벌처럼 여러 업종에 진출한 기업을 말한다.
이른바 문어발 경영이다.
기업들은 동일업종 수직·수평 통합이 제한되니 다른 업종의 기업에 손을 뻗쳤던 것이다.



80년대 초반 국제 M&A 시대 개막

복합기업들은 다른 기업을 인수할 때 적대적 공개매수기법을 애용했다.
복합기업들은 또 이때부터 투자은행 등 금융자본을 끌어들여 기업사냥에 나섰다.
적대적 인수합병이 일반적이 된 것도 사실 이때부터다.
미국 5대 복합기업은 당시 300건 이상의 다른 업종 기업 인수합병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68년 적대적 공개매수를 규제하는 윌리엄스법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에 대응해 조세회피지역 펀드를 이용한 인수합병기법이 등장하기도 한다.
기업의 인수합병을 규제하려 하자 해외 펀드를 이용해 자금출처를 숨기는 기법이 생겨난 것이다.


4차 열풍에서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현대적 기업전략이 등장하게 된다.
윌리엄스법 이후 인수합병의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기업들은 사업재편을 서두르게 된다.
7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기업들은 채산성 없는 부문을 과감하게 분할해 팔아버리고 주력업종에 전력을 기울이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주로 채택한다.
사업 재편(비즈니스 리스트럭처링)이라는 말도 이때부터 나온다.
인수합병기법이 덩치를 키우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고 기업분할과 감량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다.


최근의 SK 사건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국제 인수합병시대가 개막된 것은 80년대 초반 5차 인수합병 열풍이 불어닥치면서부터다.
82년 미국 사법부는 ‘합병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그 전에 금지됐던 수평 합병을 허용했다.
이는 반독점 규제 완화라는 당시 레이건 대통령의 정책기조와도 맞아떨어졌다.
이에 따라 적대적 인수합병이 크게 늘면서 인수합병 열풍이 다시 한번 불었다.


이 시기에는 기업인수합병이 국제화의 길을 걷는다.
80년부터 89년까지 미국 인수합병 시장에서 미국 기업을 매수한 건 수를 따져보면, 영국 951건, 캐나다 526건, 일본 250건, 서독 161건, 프랑스 157건 등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때는 경영권의 가치가 인식되면서 경영권 프리미엄이 강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경영권 프리미엄이 부각되면서 매수할 기업 자산을 담보로 자금을 차입해 인수를 진행하는 @LBO(Leverage buy-out)@와 MBO(Management buy-out)가 성행하기도 했다.
종업원들이 주체가 된 기업인수(EBO)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M&A로 성장한 SK, 이번엔 공격 당해

5차 열풍 중에 실로 엄청난 적대적 인수합병이 많이 있었다.
85년에는 컴퓨터업계 3위인 바로즈가 2위인 스페리를 인수했다.
필립모리스는 88년 덩치가 훨씬 큰 크래프트를 사들이기도 했다.


이번에 외국 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 공격 대상이 된 SK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자체가 인수합병으로 성장한 재벌이다.
그러나 한번도 적대적 인수합병은 시도한 적도, 당한 적도 없었다.
인수합병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온실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전략 없이 앉아 있다 허둥댄 것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경영권도 엄연한 경쟁의 대상이라는 점을 이제 재벌들도 인정할 때가 됐다는 얘기다.


97년 대농그룹이 소유한 미도파를 신동방이 적대적 인수합병하려 했을 때, 재계에서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조금씩 출자해 대농을 도와 경영권을 지켜줬다.
그러나 결국 대농그룹은 부도를 냈고, 미도파의 흔적은 한국 백화점업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기업 인수합병 자문회사 인핸스먼트컨설팅 이영두 사장은 “적대적 기업인수 공격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라고 말한다.
인수 대상 기업 경영진이 도덕적으로 허점을 보이거나 주주들에게 책임을 질 만한 경영 실수를 하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공격에 나서기 어렵다는 얘기다.
SK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이 없었다면 아무도 적대적 인수합병 공격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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